-55년만에 발굴된 항일민족시인 심련수(沈連洙)
기자는 2000년 7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우리 민족의 민족적 서정의 시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는 연변의 시인들을 만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뜻밖에도 항일 민족 시인 심련수 시인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아래의 글은 지난해 기자가 한국 방송대학교 학보를 통해 지상에 소개한 기사이다. 오마이뉴스를 방문하고 있는 많은 독자들에게 심련수 시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이미 지상에 보도된 내용을 상당 부분 인용하고 그때 소개되지 못한 시편들을 추가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이후 심련수 시인의 동창이신 이기형 시인과의 만남에 대한 후일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추가로 가필한 내용에 대해서는 '-'로 표기하여 원고를 작성하기로 한다.
55년만에 발굴된 항일민족시인 심련수(沈連洙)
1945년 8월 8일 일본인의 손에 피살된 시인. 도대체 왜 일본인은 해방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그를 살해했으며, 그는 누구인가? 전언했듯 그는 윤동주, 이육사 등 일제에 시로써 항거한 시인들과 동시대를 살다간 시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그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것은 1940년대 초 만주의 <만선일보>에 발표되었던 <려창의 밤>, <대지의 여름>, <대지의 가을> 등 다섯 편의 시 뿐이다. 그런 그가 지금에 와서 `용정에서 솟아난 또 하나의 별'이라는 애칭을 갖고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은 대체 무슨 연유인가?
침략과 수탈로 점철되었던 민족의 역사가 우리를 의인의 품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리고 만주벌은 그 역사적 정점으로서 살아있는 흔적이기도 하다. 오늘 여기 `심련수'라고 하는 시인이 나타나 우리들에게 다시 만주를 자각하게 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
필자가 연변을 찾은 것은 <시와 혁명> 연변지부 시인들과의 만남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의 시인을 알게 되었다. 연변의 민족시인인 조용남 선생께서 넌지시 말씀하신 심련수라는 시인의 이력을 듣자니 너무나 설레고 놀라웠다.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에서 소작농이던 심운택 씨의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심련수는 일제의 압박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1924년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로 이주, 그후 중국 용정에 뿌리를 내리고 유소년기를 보냈다. 1941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서 공부했으며 이 때 심련수는 시와 조국과 민족해방에 대해 뜻을 세우고 분출하게 된다.
그의 동생 심호수 씨는 지금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 살고 있다. 심호수 씨는 형이 죽은 후, 언젠가 떳떳하게 세상에 밝힐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감으로 항아리 속에 담아 두었던 시 3백여 편, 소설 3편, 평론 1편, 기행문 1편, 편지 2백여 통, 일기 3백여 편을 알뜰살뜰하게 보관해 오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럼 여기서 한두 편의 작품을 엿보는 것으로 심련수 시인의 족적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면서 그의 시를 읽어보자.
빨래
빨래를 생명으로 아는
조선의 엄마 누나야
아들 오빠 땀 젖은 옷
깨끗이 빨아주소
그들의 마음 가운데
불의의 때가 있거든
사정 없는 빨래 방망이로
뚜드려주소.
이 시가 바로 55년 동안 항아리 속에 묻혀 있었던 3백여 편의 시 중 한 편이다. 소박하고 정갈한 정이 배어 있는 시이다.그러나, 그 절박한 시적 호소력은 빼앗긴 나라에 대한 구원의 마음이 너무나도 절절하게 스며 있다는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불의의 때가 있거든/사정없는 빨래 방망이로/뚜드려주소”의 부분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 정신을 간직하고 살아가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간직해야 할 뼈아픈 고통의 감수까지가 스며있는 것이다. 이는 엄마와 누나가 얼마나 절박하게 바라보는 광복에의 희망인가? 이는 자기 각성과 식민지 조선청년 모두에게 각성을 요구하는 자기점검자적 요구를 시적으로 형상화해서 이야기 해내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고국에 부모로부터 보내온 돈을 받아든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늘 호수로부터 돈을 받았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떨린다. 집에서 준 것일까 쌀을 판 것일까. 편지에는 번연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몸이 고달프지만 일요일엔 꼭 밀차를 밀어야겠다.”
이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려운 집안 환경을 떠받치고 살았던 그는 이주민 조선인의 가난한 모습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실체적인 경험 속에서 부단하게 항일운동에 매진했었으며 또한 작품 속에 용해시켜내고 있었다.
가난한 거리
내가 걷는 좁다란 골목
까아맣게 끄슬은 처마밑길
울타리 없는 몽둥이집들마다
새까만 나무쪽문패가 초라하고
누덕발대 걸린 밑엔
주름진 낯이 얼른거리고
헐벗은 애들이
맨땅에 주저앉아 발버둥친다
가난한 거리
때물에 함빡 젖은 살림
번화를 자랑하는 뒤골목에는
말못할 비극이 도리질하고
탄력잃은 창백한 혈관으로
죽은 피가 쩔룩거리나니
그것은 일에 지친
이 거리의 사내였고
빛 잃은 좁은 거리는
조폐국(造幣局) 뒤골목이었다
이 시는 당대의 척박한 식민지 조선의 이주민들이 겪은 삶의 진상을 소상하게 고발해 주고 있는 시다. 지친 거리의 사내란 어쩌면 시인 자신은 아닐까? 그러나, 지친 시인 자신으로서 멈추어 버리지 않고 그 지친 이주민들과 함께 일어나고야 말겠다는 시인의 심성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싸우는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하는 일체감을 갖고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그는 살았다. 적어도 그가 일본인에 의해 피살된 1945년 8월 8일까지 그는 그렇게 살아갔던 것이다. 그의 시적 진실은 그가 썼던 일기와 기행문, 편지, 평론 등에 다양하게 증거로 나타나 있다. 머지 않은 장래에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리라 믿는다. 또한 이는 민족정신의 복원과 맞물려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남북의 통일과 민족 정신의 회복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21세기 민족의 철학적 모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를 더욱 분명하게 해주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 문화적 자산을 발굴하고 그 영역을 확보하는 데 선결적인 과제가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오늘의 심련수 선생의 이름에 값할 수 있는 연구 성과들이 나올 수 있도록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연구가들의 관심을 기대하면서 소개를 마친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알게 된 사실은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언론의 유통구조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심련수 시인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지난해 4월 그러니까 2000년 4월이다. 그 당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 문화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 온 서울의 이상규 시인이 연변을 방문했을 당시 심련수 시인이 생존하고 있는 동생 심호수 선생에 의해 그 작품과 당시의 경과들이 소개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상규 시인이 국내의 여러 신문사에게 보도를 청했으나 국내의 유력 언론사들이 그 기사의 실체를 증명해서 알려주면 보도하겠다며 보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보면 제보만으로도 그 제보의 신빙성이 확인된다면 기자를 파견하든지 취재를 하여 허물어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한 민족시인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려는 노력을 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기자가 연변에서 알게 된 이상규 시인을 찾아뵌 것은 위 기사가 방송대학교 학보에 소개된 이후이다. 기자가 이상규 시인에게 신문을 펼쳐 보이자 너무나 즐겁고 반가워 하면서 자신이 보도 요청을 했던 자료들을 내놓으시며 마치 기자가 큰 일을 해낸 것처럼 기뻐하였다.
이후 주요 일간지 기자들에게서 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와 자료를 청했다. 그러나, 당시 해당 기자들이 무성의한 태도로 자료만 건네줄 것을 청해 자료를 제공하지 않고, 지역에 강원도민일보에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 기자가 직접 강원도민일보에 자료 일체를 건네주기도 하였다.
후일에 출판사 업무차 시인이시며 독립운동가이신 이기형 선생을 찾아뵙고 또한 의외의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었다, 다름아닌 심련수 시인과 동기동창생이셨다는 사실이며 이기형 시인과는 일본에서 함께 유학을 했으며 신문팔이 등을 통해 학비를 충당하고 손수레꾼 노릇을 하며 함께 학업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기형 시인은 이미 <실천문학사>에서 간행된 몽양 여운형 선생의 평전에 몽양 선생과 심련수 시인, 그리고 이기형 선생이 함께 유원지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당시 우리 민족의 운명과 일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기형 선생께서는 해방 후 소문으로 그의 존재에 대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 있다고 말씀 하셨다. 너무나 놀랐던 사실에 대해 자랑삼아 심련수 시인을 알게 된 계기를 말씀 드렸다가 선생께서 그 심련수 시인과의 또렸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데 대해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 역사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재생되는구나. 그후, 각지에서 심련수 시인의 작품을 보내달라고 하여 전해주기도 하고, 이메일도 보내주었다. 또한, 작년 연말에는 강릉에서 최초로 문학세미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본문에 없는 시편들을 추가로 소개하고자 한다. 추후에도 기행문과 일기, 시편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방랑(放浪)
나는 가련다 정처없이 또
이 발길 가는 곳 어데냐
맞아줄 이 없는 낯선 땅
머물 곳 정함없는 타향에서
호올로 헤매고저 또 떠나노라
떠나는 나그네길 서글퍼도
안갈수 없는 방랑의 신세
어제 머물던 오막살이엔
박꽃이 수없이 피였건마는
서리전에 굳을 열매
과연 몇이나 될고.
소화 17년 8월 4일
귀한 그들
이 땅에 귀한이
몇몇이던가
묻노니 이 마음 차거니 그들을
세비로양복에 당나귀발통 신고
고리를 흔들거리는 멋쟁이보다
적동색 억센 몸에 호미쥐고 서 있는
농촌의 젊은이가 얼마나 귀하더냐
뾰족구두 색양장(色洋裝)에
가는 허리 한들거리는 아가씨보다
툭툭한 무명옷에 고무신 신은
물 긷는 농촌아가씨가 얼마나 귀하더냐
몸가짐 거칠다 깔보지 말라
수수한 그들속엔
아름다운 참마음 빛나고 있어
겉이 귀한 그들보다 속이 더욱 귀하여라.
소화 7년 4월
저녁의 부두
노동자의 지친 모습 휘청이는 부두
후줄근한 옷자락에 피곤이 흘러
콩크리트 바닥에 떨어지고
부두의 저녁은 저물어간다
먼길 떠나는 짐실은 배
떠나는 기적소리 처량도 해
모든 것 실어서 보내고 싶어
바다가 전토(戰土)는 한숨짓더라.
소화 16년 10월 21일
들불
임자모를 불
거침없이 타는 천리 저쪽녘
누가 놓은 불씨기에
저토록 꺼짐없이
밤하늘을 붉히느뇨
사정없이 타오르는
불길! 불길! 불길!
끌래야 끌 수 없는 위대한 작탄!
언제까지 이 들판에 살아있을지
어두운 저녁 혼자 보는 들불
그 불똥이 이 가슴에 튀여오기를
삼가 경건히 머리숙이고
말없이 숭엄히 바라보노라.
소화17년 1월4일
수평선
부풀어오는 수평선너머
그 님이 계신다고
내 마음이 흰돛을 달고
네 가슴을 헤쳐가리라
그 가슴에 안겨지러 가리라.
거리에서
출렁거리는 인파에 밀려
생의 활극인 막을 열면서
모두가 유명무명의 배우가 되어
스스로 즐기는 화장을 하였다
울 때는 웃고 웃을 때는 우는
극속에 극을 연출하고 있다
누구나 될수 있는 배우
누구나 볼수 있는 관중
모두가 분별없는 한곳에서
울고 웃고 먹고 자고 사랑하고 있는
땀이 쬐쬐한 그 상판에서
무슨 커다란 표정이 있을가
휩쓸려 한바탕 뒹구는 것이
무슨 경향이 있을소냐...
소화 17년 10월
비
밤비 내리는 이향거리
흐린 추억에 뻗는 고적
젖어드는 옷섶을 꺾으며
고향밤 별하늘에
님의 샛별눈 그리노라
가라앉던 그리움
설레이는 가슴속에
웃는 초상 어리는 듯
기다려 참는 고비
넘으리라 지나면 사랑의 웃음.
소화17년 6월 23일
기적(奇迹)
인간사회에는 기적이 없다
그러나 있으면 있을수 있다
네 손으로 만든 것이 그것이며
네 마음으로 아는 것이 그것이다
참다운 기적은 평범가운데서 나고
그 평범은 부단한 노력에서 온다.
소화17년 10월 5일
강무(江武)에 앉아서
네가 할 일
바줄은 끊어졌다
지말은 빨대는 먼지속에 떨어졌다
버텼던 장대도 맥없이 넘어졌다
버티어야 한다
이어야 한다
씻어야 한다
널어야 한다
끊어진 바줄!
장난군아이가 얄밉게 저지른
저주의 악극(惡劇)
사명의 줄
어느 한쪽을 풀어야만
동강난 두토막을 이을수 있을게다
키 못믿는 억센 매듭을
어떻게 풀리
이어서 씻어서 매여야 하지
장대를 버티고 널어야 하지
불쌍한 고아의 설음
꾸지람을 무서운 일에 씻어
애타는 초조의 작은 가슴을!
누구의 힘으로
누구의 손으로
누구의 귀로써
오! 너는 불쌍한 소녀
아프도록 지친 몸도 쉬더냐.
소화 18년 2월 8일밤
기자는 2000년 7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우리 민족의 민족적 서정의 시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는 연변의 시인들을 만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뜻밖에도 항일 민족 시인 심련수 시인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아래의 글은 지난해 기자가 한국 방송대학교 학보를 통해 지상에 소개한 기사이다. 오마이뉴스를 방문하고 있는 많은 독자들에게 심련수 시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이미 지상에 보도된 내용을 상당 부분 인용하고 그때 소개되지 못한 시편들을 추가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이후 심련수 시인의 동창이신 이기형 시인과의 만남에 대한 후일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추가로 가필한 내용에 대해서는 '-'로 표기하여 원고를 작성하기로 한다.
55년만에 발굴된 항일민족시인 심련수(沈連洙)
1945년 8월 8일 일본인의 손에 피살된 시인. 도대체 왜 일본인은 해방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그를 살해했으며, 그는 누구인가? 전언했듯 그는 윤동주, 이육사 등 일제에 시로써 항거한 시인들과 동시대를 살다간 시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그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것은 1940년대 초 만주의 <만선일보>에 발표되었던 <려창의 밤>, <대지의 여름>, <대지의 가을> 등 다섯 편의 시 뿐이다. 그런 그가 지금에 와서 `용정에서 솟아난 또 하나의 별'이라는 애칭을 갖고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은 대체 무슨 연유인가?
침략과 수탈로 점철되었던 민족의 역사가 우리를 의인의 품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리고 만주벌은 그 역사적 정점으로서 살아있는 흔적이기도 하다. 오늘 여기 `심련수'라고 하는 시인이 나타나 우리들에게 다시 만주를 자각하게 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
필자가 연변을 찾은 것은 <시와 혁명> 연변지부 시인들과의 만남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의 시인을 알게 되었다. 연변의 민족시인인 조용남 선생께서 넌지시 말씀하신 심련수라는 시인의 이력을 듣자니 너무나 설레고 놀라웠다.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에서 소작농이던 심운택 씨의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심련수는 일제의 압박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1924년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로 이주, 그후 중국 용정에 뿌리를 내리고 유소년기를 보냈다. 1941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서 공부했으며 이 때 심련수는 시와 조국과 민족해방에 대해 뜻을 세우고 분출하게 된다.
그의 동생 심호수 씨는 지금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 살고 있다. 심호수 씨는 형이 죽은 후, 언젠가 떳떳하게 세상에 밝힐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감으로 항아리 속에 담아 두었던 시 3백여 편, 소설 3편, 평론 1편, 기행문 1편, 편지 2백여 통, 일기 3백여 편을 알뜰살뜰하게 보관해 오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럼 여기서 한두 편의 작품을 엿보는 것으로 심련수 시인의 족적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면서 그의 시를 읽어보자.
빨래
빨래를 생명으로 아는
조선의 엄마 누나야
아들 오빠 땀 젖은 옷
깨끗이 빨아주소
그들의 마음 가운데
불의의 때가 있거든
사정 없는 빨래 방망이로
뚜드려주소.
이 시가 바로 55년 동안 항아리 속에 묻혀 있었던 3백여 편의 시 중 한 편이다. 소박하고 정갈한 정이 배어 있는 시이다.그러나, 그 절박한 시적 호소력은 빼앗긴 나라에 대한 구원의 마음이 너무나도 절절하게 스며 있다는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불의의 때가 있거든/사정없는 빨래 방망이로/뚜드려주소”의 부분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 정신을 간직하고 살아가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간직해야 할 뼈아픈 고통의 감수까지가 스며있는 것이다. 이는 엄마와 누나가 얼마나 절박하게 바라보는 광복에의 희망인가? 이는 자기 각성과 식민지 조선청년 모두에게 각성을 요구하는 자기점검자적 요구를 시적으로 형상화해서 이야기 해내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고국에 부모로부터 보내온 돈을 받아든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늘 호수로부터 돈을 받았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떨린다. 집에서 준 것일까 쌀을 판 것일까. 편지에는 번연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몸이 고달프지만 일요일엔 꼭 밀차를 밀어야겠다.”
이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려운 집안 환경을 떠받치고 살았던 그는 이주민 조선인의 가난한 모습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실체적인 경험 속에서 부단하게 항일운동에 매진했었으며 또한 작품 속에 용해시켜내고 있었다.
가난한 거리
내가 걷는 좁다란 골목
까아맣게 끄슬은 처마밑길
울타리 없는 몽둥이집들마다
새까만 나무쪽문패가 초라하고
누덕발대 걸린 밑엔
주름진 낯이 얼른거리고
헐벗은 애들이
맨땅에 주저앉아 발버둥친다
가난한 거리
때물에 함빡 젖은 살림
번화를 자랑하는 뒤골목에는
말못할 비극이 도리질하고
탄력잃은 창백한 혈관으로
죽은 피가 쩔룩거리나니
그것은 일에 지친
이 거리의 사내였고
빛 잃은 좁은 거리는
조폐국(造幣局) 뒤골목이었다
이 시는 당대의 척박한 식민지 조선의 이주민들이 겪은 삶의 진상을 소상하게 고발해 주고 있는 시다. 지친 거리의 사내란 어쩌면 시인 자신은 아닐까? 그러나, 지친 시인 자신으로서 멈추어 버리지 않고 그 지친 이주민들과 함께 일어나고야 말겠다는 시인의 심성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싸우는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하는 일체감을 갖고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그는 살았다. 적어도 그가 일본인에 의해 피살된 1945년 8월 8일까지 그는 그렇게 살아갔던 것이다. 그의 시적 진실은 그가 썼던 일기와 기행문, 편지, 평론 등에 다양하게 증거로 나타나 있다. 머지 않은 장래에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리라 믿는다. 또한 이는 민족정신의 복원과 맞물려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남북의 통일과 민족 정신의 회복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21세기 민족의 철학적 모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를 더욱 분명하게 해주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 문화적 자산을 발굴하고 그 영역을 확보하는 데 선결적인 과제가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오늘의 심련수 선생의 이름에 값할 수 있는 연구 성과들이 나올 수 있도록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연구가들의 관심을 기대하면서 소개를 마친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알게 된 사실은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언론의 유통구조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심련수 시인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지난해 4월 그러니까 2000년 4월이다. 그 당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 문화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 온 서울의 이상규 시인이 연변을 방문했을 당시 심련수 시인이 생존하고 있는 동생 심호수 선생에 의해 그 작품과 당시의 경과들이 소개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상규 시인이 국내의 여러 신문사에게 보도를 청했으나 국내의 유력 언론사들이 그 기사의 실체를 증명해서 알려주면 보도하겠다며 보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보면 제보만으로도 그 제보의 신빙성이 확인된다면 기자를 파견하든지 취재를 하여 허물어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한 민족시인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려는 노력을 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기자가 연변에서 알게 된 이상규 시인을 찾아뵌 것은 위 기사가 방송대학교 학보에 소개된 이후이다. 기자가 이상규 시인에게 신문을 펼쳐 보이자 너무나 즐겁고 반가워 하면서 자신이 보도 요청을 했던 자료들을 내놓으시며 마치 기자가 큰 일을 해낸 것처럼 기뻐하였다.
이후 주요 일간지 기자들에게서 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와 자료를 청했다. 그러나, 당시 해당 기자들이 무성의한 태도로 자료만 건네줄 것을 청해 자료를 제공하지 않고, 지역에 강원도민일보에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 기자가 직접 강원도민일보에 자료 일체를 건네주기도 하였다.
후일에 출판사 업무차 시인이시며 독립운동가이신 이기형 선생을 찾아뵙고 또한 의외의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었다, 다름아닌 심련수 시인과 동기동창생이셨다는 사실이며 이기형 시인과는 일본에서 함께 유학을 했으며 신문팔이 등을 통해 학비를 충당하고 손수레꾼 노릇을 하며 함께 학업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기형 시인은 이미 <실천문학사>에서 간행된 몽양 여운형 선생의 평전에 몽양 선생과 심련수 시인, 그리고 이기형 선생이 함께 유원지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당시 우리 민족의 운명과 일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기형 선생께서는 해방 후 소문으로 그의 존재에 대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 있다고 말씀 하셨다. 너무나 놀랐던 사실에 대해 자랑삼아 심련수 시인을 알게 된 계기를 말씀 드렸다가 선생께서 그 심련수 시인과의 또렸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데 대해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 역사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재생되는구나. 그후, 각지에서 심련수 시인의 작품을 보내달라고 하여 전해주기도 하고, 이메일도 보내주었다. 또한, 작년 연말에는 강릉에서 최초로 문학세미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본문에 없는 시편들을 추가로 소개하고자 한다. 추후에도 기행문과 일기, 시편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방랑(放浪)
나는 가련다 정처없이 또
이 발길 가는 곳 어데냐
맞아줄 이 없는 낯선 땅
머물 곳 정함없는 타향에서
호올로 헤매고저 또 떠나노라
떠나는 나그네길 서글퍼도
안갈수 없는 방랑의 신세
어제 머물던 오막살이엔
박꽃이 수없이 피였건마는
서리전에 굳을 열매
과연 몇이나 될고.
소화 17년 8월 4일
귀한 그들
이 땅에 귀한이
몇몇이던가
묻노니 이 마음 차거니 그들을
세비로양복에 당나귀발통 신고
고리를 흔들거리는 멋쟁이보다
적동색 억센 몸에 호미쥐고 서 있는
농촌의 젊은이가 얼마나 귀하더냐
뾰족구두 색양장(色洋裝)에
가는 허리 한들거리는 아가씨보다
툭툭한 무명옷에 고무신 신은
물 긷는 농촌아가씨가 얼마나 귀하더냐
몸가짐 거칠다 깔보지 말라
수수한 그들속엔
아름다운 참마음 빛나고 있어
겉이 귀한 그들보다 속이 더욱 귀하여라.
소화 7년 4월
저녁의 부두
노동자의 지친 모습 휘청이는 부두
후줄근한 옷자락에 피곤이 흘러
콩크리트 바닥에 떨어지고
부두의 저녁은 저물어간다
먼길 떠나는 짐실은 배
떠나는 기적소리 처량도 해
모든 것 실어서 보내고 싶어
바다가 전토(戰土)는 한숨짓더라.
소화 16년 10월 21일
들불
임자모를 불
거침없이 타는 천리 저쪽녘
누가 놓은 불씨기에
저토록 꺼짐없이
밤하늘을 붉히느뇨
사정없이 타오르는
불길! 불길! 불길!
끌래야 끌 수 없는 위대한 작탄!
언제까지 이 들판에 살아있을지
어두운 저녁 혼자 보는 들불
그 불똥이 이 가슴에 튀여오기를
삼가 경건히 머리숙이고
말없이 숭엄히 바라보노라.
소화17년 1월4일
수평선
부풀어오는 수평선너머
그 님이 계신다고
내 마음이 흰돛을 달고
네 가슴을 헤쳐가리라
그 가슴에 안겨지러 가리라.
거리에서
출렁거리는 인파에 밀려
생의 활극인 막을 열면서
모두가 유명무명의 배우가 되어
스스로 즐기는 화장을 하였다
울 때는 웃고 웃을 때는 우는
극속에 극을 연출하고 있다
누구나 될수 있는 배우
누구나 볼수 있는 관중
모두가 분별없는 한곳에서
울고 웃고 먹고 자고 사랑하고 있는
땀이 쬐쬐한 그 상판에서
무슨 커다란 표정이 있을가
휩쓸려 한바탕 뒹구는 것이
무슨 경향이 있을소냐...
소화 17년 10월
비
밤비 내리는 이향거리
흐린 추억에 뻗는 고적
젖어드는 옷섶을 꺾으며
고향밤 별하늘에
님의 샛별눈 그리노라
가라앉던 그리움
설레이는 가슴속에
웃는 초상 어리는 듯
기다려 참는 고비
넘으리라 지나면 사랑의 웃음.
소화17년 6월 23일
기적(奇迹)
인간사회에는 기적이 없다
그러나 있으면 있을수 있다
네 손으로 만든 것이 그것이며
네 마음으로 아는 것이 그것이다
참다운 기적은 평범가운데서 나고
그 평범은 부단한 노력에서 온다.
소화17년 10월 5일
강무(江武)에 앉아서
네가 할 일
바줄은 끊어졌다
지말은 빨대는 먼지속에 떨어졌다
버텼던 장대도 맥없이 넘어졌다
버티어야 한다
이어야 한다
씻어야 한다
널어야 한다
끊어진 바줄!
장난군아이가 얄밉게 저지른
저주의 악극(惡劇)
사명의 줄
어느 한쪽을 풀어야만
동강난 두토막을 이을수 있을게다
키 못믿는 억센 매듭을
어떻게 풀리
이어서 씻어서 매여야 하지
장대를 버티고 널어야 하지
불쌍한 고아의 설음
꾸지람을 무서운 일에 씻어
애타는 초조의 작은 가슴을!
누구의 힘으로
누구의 손으로
누구의 귀로써
오! 너는 불쌍한 소녀
아프도록 지친 몸도 쉬더냐.
소화 18년 2월 8일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