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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일탈과 허무의 진실

  • 전경업
  • 조회 9884
  • 회원시평
  • 2006.04.08 20:54
현실의 일탈과 허무의 진실
-남철심 시집 "우리에게 하늘이 있습니까?"에서 보여주는 "바람"의 이미지를 두고

우리는 과연 허무의 숙명을 보따리마냥 등에다 짊어지고 일탈되는 현실의 광야를 힘겹게 걸어야만 한단 말인가?

어둠이 내리는 다리목에
사랑같이 풀이 자라고
강내음이 풍기고
떠나가는 사람의
뒤모습이 흔들리고
("리별의 다리목에서"의 첫련. 하략)

한폭의 풍경화, 그러나 현실은 허황하게 펼쳐진 초원에 피어나 한 송이 꽃이 바람에 한들거리듯이 아련하게 우리들의 시야에 안겨오는 괴리된 진실이다.
이런 현실과 일탈된 진실을 시인은 정신분열증에 걸려 한송이 꽃으로 시들어가는, 그러나 다시 한권의 시집으로 처량하게 피어나는 "찌에꼬꽃"을 빌어 그리고 있다.
"찌에꼬 꽃"은 단순한 사랑의 꽃이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생소하게, 그러나 너무도 아름답게 단 몇 줄의 주석(註釋)으로 안겨온 "찌에꼬 꽃", 정신분렬증에 걸린 여인이 시인 남편에 의해 한권의 시집으로 피어나는 "찌에꼬꽃"은 일탈되는 현실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너에게")
정신분렬증에 걸렸다 함은,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 되었던간 정신분열증은 한 인간의 자아망실과 현실에 대한 자아의 위치문란, 즉 현실이 증발된, 아니면 과거가 증발된 정신상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연한 아름다움과 함께 허무한 현실을 감각하게 된다.
남철심의 시에서 자아는 언제나 과거와 함께 현실에서 괴리되고 있으며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는 언제나 분리되면서 새로운 자아의 출생을 시도하고 있다. 또는 그런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네가 죽는 날
나는 아침을 먹고
이를 닦았다
(중략)

지쳐서 돌아오는 길에
한 잔 하고
나는 울었다.

네가 죽는 날
살아서 나도 슬펐다."
("네가 죽는 날")

"너", 즉 과거의 나는 죽어가고 그러나 오늘의 나는 이 과거의 나를 이어 가면서 인고(忍苦)의 생을 개척해가는 슬픈 사람인 것이다. 살아있는 현실의 "나"와 죽어간 과거의 나, 즉 "너"는 서로 괴리되면서 과거에 각인된 허무한 "나"와 슬픈 오늘의 "나"는 하나의 진실한, 그러나 어딘가는 허무한 느낌을 주는 새롭고 진실한 "나"를 낳는 것이다.
이런 감각은 시집의 첫 시 "하루를 위하여"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하루를 위하여
하루를 죽는다
...
딱 한 번 만져보고 싶은 것이 있어
가까이 가 만져보면 아니고
되돌아가 다시 만져 보아도 아니고
...
헤매는 동안
생명을 잠그는
물이 깊어진다

그런 밤
말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세상의 저 끝에
예수의 입술처럼
조용하다."

"위하"는 "하루"는 내일이고 "죽는" "하루"는 과거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만져보고 싶어 만져보아도 허무하여 진실하지 않은 것이고("아니고"), 그러나 되돌아서 다시 찾아도 과거로 각인되어 허무한 현실로 되어 진실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다시 만져보아도 아니고"). 그래서 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를 방황하는 사이 "생명은 잠그"어 지고 허무의 "물"이 "깊어 지"는 것이다. 이런 생의 감각은 또한 현재, 진실한 현실의 감각과 괴리된, 입을 다문 예수의 말소리, 너무도 아득히 먼, 진실을 잃은 "말소리"로 느껴지는 것이다.
너무도 아득해 허무한 것인가?

이런 허무의 감각은 문득 다가오는 허무의 감각과 우리들 진실의 지평에서 일탈되는 현실로 피부에 와 닫는 것이다.
"사월의 오후 3시"에서 시인은 이런 허무의 도래를 이렇게 쓰고 있다.
"지하철 벽에 붙은/ 축축한 시간의 방향이/ 얼굴을 밀어버리는/ 사월의 오후 3시/ 리발소에서 나오며/ 진땀을 흘렸다/ ...(중략) 내가 나인 것이 무서운/ 이 시간/ 사꾸라가 즐벅한/ 사월의 오후 3시/ 지하철은 시간대로/ 나를 실어다 버리고/ 다시 버렸다."(이상 "사월의 오후 3시")

이발은 한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서 괴리된 진실의 "나"인 것이다. "리발소"에서 깍고 밀고 닦고 하여 과거의 나는 죽어버린 것이고 현실의 나로 태어난 것이다, 하여 현실의 나는 과거의 나의 연속이면서도 또 과거의 내가 아닌 현실의 나인 것이다. 이 새로운 나의 탄생을 시인은 "리발"을 빌어 조각했고 이 시간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과거 현실의 일탈을 시인은 지하철은 시간대로 나를 실어다 버린다는 표현형식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거의 내가 현실의 나와 괴리되고 또 그런 가운데서 과거와는 허무하고 현실과는 진실한 "자아"에 대한 감각은 "존재의 무"와 "오늘도 0시"에서도 우리는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끝내/ 나는/ 죽었다// ...(중략)/ 피가 없고/ 백골이 보이지 않는/ 끝없이 서늘한 세상에/ 나는 서서 식어있다// 그리고 길이다/ 안개낀 벼랑끝으로/ 당신을 끌고 오고있다// ...(하략)" 죽은 나와 끌려오고 있는 당신은 과거의 나요, 비록 등장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과거의 당신, 즉 나를 끌고오고 있는 것은 현실의 나인 것이다.
"오늘도 0시"는 더욱 직관적인 상징으로 자아의 분해를 그려보고 있다. 0시란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분계점이기도 한 것이다. 이 분계점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는 서로 헤어지고 갈라지고 분해되고 허무와 진실사이를 오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0시
시작과 종점의 교차점에서
나는 두쪽으로 갈라진다

꽁꽁 여민것과
헐벗은 것이
서로 손가락질 하며 웃는다

시계는 땡-땡-
열두점을 다 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갈 길을 가고...
(시 "오늘도 0시" 전문)

이렇게 시는 가장 직관적이고 명확한 상징으로 인간의 자아 분해와 현실에서 허무의 괴리를 읽어보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시시각각 자아의 각색변화와 자아의 부단한 갱신을 느끼면서 따라서 진실과 괴리되는 현실의 허무를 느끼게 되고 또 이런 허무를 느낌으로 허무는 마치도 평범한 물위에 던진 돌멩이로 일어나는 "파문"마냥 이 진실의 세계에서 퍼져가는 파문으로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동그라미")
그러나 남철심의 시에서 나타나는 일탈되는 현실과 진실에서 괴리되는 허무는 어쩌면 우리의 "신상"과도 직접적인 인연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
우리들의 민족상을 그려보는 시들에서 어쩌면 그런 선색을 찾을 수 있는 듯 하기도 하다.

"어머니, 지금은 제 이름을 부러주소이다
옛날처럼 그렇게 제 이름을 불러주소이다
붉은 초롱 높이 걸린 추녀아래
오늘밤 제게는 이름이 없소이다"
("추석달" 마지막련)

과연 이름이 없는, 이름을 잃은 우리여서 이처럼 현실과 일탈된 허무를 느끼는 것인가?
그러나 다시 근 수천년의 민족사를 돌이켜 보면서 시인은 자기의 정확한 입지와 현실을 찾아보려는 노력도 보이고 있다.

"버려지는 모습으로
어데선가 바람은 불고

살아있는 이야기
뒷면에는
사시절 비가 내린다

(중략)

나의 것이 아니고
빵을 떼어먹은 자리엔
짐승의 이발

우리는 누구를 위한
맛 없는 밥인가
반찬인가

(하략)"

수 백년간, 비록 주권을 잃지를 않았으나 언제나 열강들의 틈서리에서 살아오면서 붉은피 랑자한 상처로 가득한 우리들의 신상을 살펴보면서 피에 젖은 진실을 느껴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민족의 현 상황에 대한 직시는 "길", "그런 날 그런 생각" 등과 같은 시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아마 그래서 다시 시인은 그처럼 허무를 느끼며 일탈되는 현실을 그처럼 강렬하게 느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았을 적에 우리는 남철심의 시집 "우리에게 하늘이 있습니까?"의 구석구석마다에서 느껴 볼 수 있는 "바람"의 이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남철심의 시집 "우리에게 하늘이 있습니까?"는 구석구석에 "바람"의 이미지가 심어져 있으며 거의 시마다에서 "바람"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고 또 "바람"이라는 단어는 직접 등장하지 않은 시들에서도 "바람"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K
제목부터가 그런 것이다. 강한 의문을 던져주는 제목부터 우리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껴보게 된다. 우주에 창일한 바람은 언제나 저 푸르른 하늘에서 오가고 그 푸른하늘의 점점의 구름, 흩날리는 구름에서도 우리는 바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바람은 느낄 수 있으면서도, 감각은 할 수 있지만 볼 수는 없는 허무의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허무의 존재가 남철심의 시마다에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현실과 일탈되면서 진실한 허무를 감각하게 된다.
2002년 11월 20일 길림 룡담산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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