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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산성

  • 전경업
  • 조회 10302
  • 두만강여울소리
  • 2006.06.13 11:51
마지막 산성


세기를 마감하여 눈이 많이도 내린다. 전반 20세기에 걸쳐 인간들의 마음마다에 준 상처를 깨끗이 치유해주기라도 할 듯이 함박눈이 많이도 내린다.
나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길림시 교외에 자리잡은 용담산(龍潭山)에 올랐다. 용담산에는 2천년을 자랑하는 고구려의 산성이 있다. 모든 것이 다 눈에 덮인 가운데 오로지 고구려의 산성 일각만이 거꾸러질 줄 모르는 사나이마냥 하늘을 버티고 거연히 솟아 있다. 일설에 용담산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상성이라고 한다. 무너진 돌각담과 산 아래 무연하게 펼쳐진 벌판에서는 마치도 아직까지 창과 칼을 휘두르며 전장을 달렸을 용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산성을 지키는 아낙들의 바람에 나부끼는 치마폭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역사는 2천년을 굽이쳐 우리를 이 자그마한 산성에 세워놓았다. 그제 날의 용사들과 미인들은 다 묵묵히 흙으로 돌아가고 산성의 일각만 당그랗게 산봉우리에 놓여 있다. 그러나 연연한 산발을 타고 이어졌을 산성과 물을 비축해두었었다는 저수지, 그리고 양식을 저장해두었었다는 창고 유적지를 보면서 재부보다 땅을, 땅보다 인간을 중히 여긴 고구려 사람들의 인본주의 정신을 얼마든 감지할 수 있었다.
진공이 어렵고 방어에 편리한 산성을 많이 쌓아올린 고구려 사람들은 무엇보다 생존을 염두에 두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외적을 당할 수 없을 경우를 염려하여 산성을 쌓아두고 생사의 관두에는 견벽청야(堅壁淸野)하고 산성으로 철수를 하여 우선 자기를 보호했던 것이다. 우선 살아있어야 땅을 지킬 수 있고 사람만 살아있다면 땅을 잃었더라도 도로 찾을 수 있다는 신심에서였다. 이것은 중원(中原)의 도시 성벽을 위주로 한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중원의 도시 성벽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고 고구려의 산성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생존본능에서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집착에서였을 것이다. 하기에 고구려의 사람들은 흙으로 돌아갔어도 허물어졌으나 거연한 산성유적지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생존의 의미와 생명을 열어갈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구려 정신이 숨쉬는 산성 앞에서 저도 모르게 네트워크의 힘을 입어 바야흐로 하나로 되고 있는 우리의 생존 환경과 그에 따른 생존방식을 생각해보게 된다.
컴퓨터가 고급 지식분자들의 책상머리에서 나와 평민화되고 네트워크가 순 군사용 통신시설에서 벗어나 일반화됨에 따라 우리들의 생존환경은 진정한 혁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떤 학자들의 말을 따른다면 근대에 이르러 하나의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는 몇 달이 걸렸고 현대의 공업시대에 들어서서 하나의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는 교통도구의 힘을 입어 며칠이 걸렸고 오늘에 이르러 한 가지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는 즉시적(卽時的), 즉 현장과 동보(同步)로 된다고 한다. 하여 거리는 축소되고 공간은 줄어든다. 그러나 그것이 필경은 네트워크를 통한 것인만큼 우리는 대화의 내용만 알 수 있을 뿐 대화의 대상은 알 수 없다. 하여 네트워크는 박사생 도사와 국민학교 학생을 동일한 평등의 자리에 세워놓는 것이다. 하여 세계는 줄어들고 차별은 사라지고 있다. 게다가 날따라 빨라지는 속도는 사람을 원자와 분자로 분해시킨다. 왕역군이라는 광학영역의 저명한 과학자가 이끄는 연구팀은 특수한 환경에서 빛의 속도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속도의 300배나 된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또 어떤 과학자는 혈액의 흐름세에 힘입어 진기를 일으킬 수 있는 나미(마이크로 미크론, nm. 1m의 10억 분의 1)급 발동기까지 만들어냈고 또 어떤 과학자들은 단 세 개의 원자로 이뤄진 양자(量子) 처리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우리들의 시대는 각일각 신화시대로 돌진하고 있다. 수천 수만 개의 나미급 발동기가 우리들의 혈관에서 전기를 일으켜 우리들의 세포마다에 장치된 힘에 에너지를 보내주고 또 그런 처리기들은 초당 수십억 차의 계산속도로 정보를 처리하고 결정을 내릴 것이다.
맙소사!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모든 불평등과 지혜, 모든 차별과 차이가 사라지게 될 시대가 들이닥치는 것인가?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생존환경과 주위 환경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왕도 가고 거지도 가고 나라도 가고 장군도 가버린 저 텅빈 산성을 바라보면서 다시 생존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국경선도 사라지고 자본도 사라지고 이데올로기도 사라지고 존비 귀천(尊卑貴賤)도 사라질 것이다.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저 산성과 같은, 자기의 민족적 개성을 가진 문화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자기 민족문화에 대해 발굴과 보호를 그처럼 중히 여기고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으며 또 그런 문화가 존속함으로써만이 우리의 세계는 자기의 다양성(多樣性)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것이다.
하여 다시 한번 바야흐로 펼쳐지는 21세기를 생각해본다. 21세기에 우리는 많은 것을 버리게 되고 또 잃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수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이어오면서 인간과 생명을 더 없이 소중히 여겼던 고구려와 맥을 잇고 있는 우리들이 갖은 풍상고초를 겪으면서 불사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집을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나라를 잃었을망정 우리는 자기의 문화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까지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우리가 떳떳이 자기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생명에 생명의 원수(原水)를 가져다 준 뿌리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았을 적에 한민족은 경제력보다도 문화정신에 의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중원을 주름잡고 장강 남북을 한손에 휘어잡아 대청제국(大淸帝國)의 성세(盛世)를 누렸던 만족의 동화(同化)는 경제력과 정치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문화의 소외로 인해 역사의 무대에서 한 옆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래서 저 고구려의 마지막 산성은, 고구려의 산성이 살아 숨쉬는 저 산성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눈처럼 하얗고 햇빛처럼 밝고 깨끗하게 살아왔고 또 살아갈 우리들은 21세기에도 역시 자기의 발자국을 역사의 현장에 또렷이 찍어 놓을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을 적시며 눈은 그냥 내리고 있다. 지나간 발자국을 덮고 또 지나갈 사람들의 발자국을 남기려는 듯 펑펑 무겁게 쏟아진다.

2001.1.


*용담산(龍潭山) : 중국 길림성 길림시 서쪽 교외에 있는 작은 산. 산에는 산발을 타고 쌓아 올린 고구려 산성 유적지가 있다.
*지난 2006년 6월 10일, 용담산고구려산성은 국가문화부로부터 국가급중점보호문물로 지정 받았다. 이를 기념하며 이 글을 다시 올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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