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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평야를 지나서

  • 전경업
  • 조회 9978
  • 회원시평
  • 2006.04.08 20:56
고독의 평야를 지나서
- 선경(禪境)을 드나드는 한춘의 내심세계


무연이 펼쳐진 고독과 적막의 평야를 지나면 과연 어떤 곳인가? 혼탁한 속세의 소란스러움을 간파한 선경(禪境)이 다가오는 것인가? 한춘은 분명 고독의 평야와 선경의 무감각하고 아름다운 황홀경 사이에서 자유로이 오가고 있다.
"끝간데가 보이지 않는 일망무제한 동북대평원이 펼쳐진다." 바로 한춘은 이 고독의 평야를 주름잡고 있는 것이다.
"그 속을 손쌀 같이 꿰 질러가는 열차에 몸을 담을 때가 무한한 연상과 환각에 잡히곤 한다. 한 그루의 포플러나무에서도 시 한 수를 주우려고 서둔다.
그러나 명상은 자꾸만 깨어진다. 뭐가 그리 흥분되는지 단체 승객들은 쉴새없이 수군거린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열차의 금속마찰음과 흔들림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환각을 토막토막 잘라버린다. 공연히 짜증이 나서 텅 빈 머리로 차창 밖을 응시한다."
인생 춘하추동의 수련으로 이제는 마음이 홍진(紅塵)을 간파한 듯한 한춘의 상상과 감응은 저도 몰래 선경에로 달리고 있으나 또 속세의 교란으로, 마음은 뛰쳐나가려 하나 육신의 감각으로 몸은 언제나 고독과 적막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여 한춘의 "명상"은 자꾸만 깨어지면서 참선한 듯한 황홀경에서 자꾸만 현실로 끌려온다.
그러나 한춘의 명상은 발목에 칭칭 감기는 이런 속세의 현실적인 교란을 여유 작작 풀어버리며 나름대로 그냥 마음의 광야를 질주한다.
그래서 평범했던, 그러나 우리들이 너무나도 무심히 지나치는 저녁 노을의 황홀경에서도 일렁이는 무명의 감동을 찾게 된다. 하여 한춘은 무심한 "선경"의 벌판을 자기만의 꽃피고 새 우는 아름다운 화원으로 가꿔간다.
"그러나 그 기막힌 아름다움에 몸살을 알았을 듯했지 아무런 시상을 건져내지 못하였다... 말의 과잉 속에 명상이 고일 여백을 좀처럼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떨쳐 나오기엔 너무도 폭발력이 미약했다." 비록 현실은 이처럼 속세로 한춘을 꺼당겼지만 한춘은 한춘대로 그냥 마음의 마차에 명상의 날개를 펼쳐준다. "시멘트 각질로 뒤덮인 도시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하나의 생명체에 나태해졌던 신경에 질타를 던져준다."(이상 "저녁노을")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으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느껴 가는 한춘이다. 그래서 콩콩 짖다가 잠든 강아지와 밥상 밑으로 기어가는 고양이도 한춘에게는 그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지어 노을 뒤에 사려있는 어둠마저도 한춘은 아름다운 무엇으로 명상을 달려 보기도 한다.
마음의 자유로운 들 말은 언제나 현실의 속박을 박차고 사상의 선경(禪境)에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또 육신에 대한 현실의 마찰로 이런 자유로운 명상은 다시 소란한 진세(塵世)로 끌려온다. 하여 한춘은 현실에 대한 초탈의 고독과 자유의 상상으로 황홀한 선경사이를 오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밤중에 깨어나 돌이켜 보면 자기의 이런 상상과 자문은 겨우 우문우답이라는 퉁명스러운 생각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선경을 드나드는 한춘의 상상을 방해하지 않는다. 외려 그의 상상에 황홀한 경치만을 더 해줄 뿐이다.
그래서 그토록 지긋지긋한 무더위와 땡볕에서도 한춘은 아름다운 진록의 생명을 찬양할 수 있고 사람들의 고작 두 손바닥만한 가슴에서 펼쳐질 수 있는 무한한 마음의 넓은 초원을 상상해 낼 수도 있으며 그 마음에 있는, 사랑을 건지는 두레박과 욕심을 건지는 두레박을 보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백년 더위" 같은 지긋지긋한 환경 속에서도 한춘은 그 더위를 떠 이고 진록으로 무르익어 가는 아름답고 끈질긴 생명을 파낼 수 있는 것이다.
"불볕더위로 쌓인 침묵의 산기슭엔 산 꽃, 들녘엔 들꽃의 향기가 무르녹고 있다. 어쩌다 틈나는 대로 내려준 소나기에 들은 푸르게 씻기고 꽃 향은 진하게 펴진다. 그 속에 잘 자랐던 못 자랐던 논의 벼들이 가뭄을 이기며 가지치기에 한창이다. 계절의 숨결이 그 대로 푸르게 살아나는 풍경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이 가장 즐겁게 만나 한여름에 얽혔다가 다시 헤어지는 출연이다. 땅의 기(氣)는 하늘의 기를 받아 지금 막 지표(地表)의 색깔을 진록의 성장으로 펼친다."
지긋지긋한 염천의 무더위 속에서 한춘이 보아낸 것은 햇빛의 독염(毒炎)이 아니라 생명의 끈질김과 아름다움, 그리고 저기 저 빛나는 태양과 이 땅의 낭만 짙은 사랑의 출연이었다.
그러나 한춘은 절대로 선경에 안주(安住)하는 도인이나 스님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때든 한춘, 현실을 살아가는 사상의 인간이었다.
하기에 그의 사상은 언제나 선경을 유람하다가는 다시 현실 속으로 후닥닥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다.
"백년 더위 속에서도 푸름의 진록색이 생명찬가를 부른다. 도리는 같다. 그 어떤 곤경이나 역경에서도 인민은 자신의 앞날을 자신의 힘으로 일으켜 세운다. 이것 또한 생명의 순리이다. 가령 넓은 마음의 깊은 우물에서 풀 수 없는 앙금만 길어 올리도록 한다면 그것은 전도된 현실이다."이렇게 한춘은 선경에서 현실로 돌아와 자기의 글을 지나가는 독자들에게 인생의 참다운 삶을 깨우치기도 한다.
그래서 백년더위에서 가는 뿌리 하나로 생명을 진록으로 출연하는 풀처럼 인간들도 소망 하나로 아름다운 생명의 삶을 살아갈 것을 말해보기도 한다.
"땡볕이여, 뿌리내리기가 너를 물리칠 것이다.
산자락을 에돌며 들려오는 무언의 메아리, 이제 들녘도 침묵으로 가뭄을 길들이고 있다."(이상 "백년더위")
그러나 이런 깨우침은 다만 점을 찍어주는데 그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적중한 한마디만 남기도 다른 상상은 각자 나름에 맡기고 자기는 그냥 다시 선경으로 날아가 버린다.
두 손바닥만한 크기밖에 되지 않는 가슴에 너른 마음, 그리고 깊은 우물을 가지고 있는 한춘, 그는 무심한 듯 현실을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의 선경을 거닐면서도 현실 속으로 문득문득 찾아 들어왔다가는 다시 간다는 소리도 없이 훌쩍 떠나가 버리기도 한다. 하여 그의 수필은 그의 시와 마찬가지도 상상의 낭떠러지들을 훌쩍훌쩍 뛰어넘기도 하는 것이다.
휴가와 거미처럼 끈질기게 달라붙는 일상, 그러루한 일상에 매운 자기의 신세를 훑어보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이것이 물서리 내리는 백로가 다가오는 계절이라고 느낀다. 그러다가 잠깐 하늘에 총총한 별을 한두 개 헤어보고는 거기서 또 "낭만의 가능성이 있어 무등" 기뻐한다.
"빌딩의 숲 사이로 희부옇게 먼지 공해로 덮인 하늘이 보일 뿐인 도회지의 저녁이다. 그런 대로 한번쯤 머리를 들어 별자리를 헤어 볼만하다. 은하수도 보이고 그 양옆에 접근한 견우성과 직녀성도 보인다. 구태여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여유 있는 마음으로 하늘을 굽어본다는 그 자체가 인간다운 숨결을 되찾는 순간이다."
이렇게, 그 별을 잠깐 헤어보고 또 여유 있는 마음으로 하늘을 굽어보는 바로 그 작은 일 하나에서 인간다운 숨결을 되찾는 한춘, 이쯤이면 한춘은 득도(得道)를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던들 그는 고독과 적막의 평야를 지나 자아의 "선경(禪境)"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을 것이다.
옛날 한 스님이 운유(雲遊)를 하던 중 산길을 걷게 되었단다.
그런데 산길을 가던 그 스님은 갑자기 저도 모르게 비탈진 산기슭의 길가에 피어있는 민들레꽃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민들레꽃에 다가서 한동안 민들레꽃을 눈 여겨 들여다보던 그 스님은 갑자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스님의 운유는 산과 물을 얼마나 지났는 지 모를 것이다. 그 전에도 그는 산기슭에 피는 이 꽃 저 꽃, 그리고 지금 보고 통곡을 하는 민들레꽃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지나가다가 산비탈의 길가에 말없이, 보는 이 없어도, 담담히 피어있는 민들레를 보고 통곡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는 이 없어도 나름대로 아름답게만 피어나는 민들레꽃이 가엾어서? 민들레꽃의 생명에 대한 집착에 감동이 되어? 민들레꽃처럼 생을 살아가다 지고 말 자기의 생명을 생각하고? 우리는 그 스님이 어째서 그렇게 통곡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혹시 그 스님은 과거에도 수 없이 보고 지나쳤을 민들레꽃을 보고 그 민들레꽃에서 자기의 생명을 감각하고 생명에 대한 감동으로 통곡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바로 한춘의 도시 오염의 먼지사이로 하늘을 쳐다보며 별자리를 하나 둘 헤어보고 또 그로부터 35년 전 자기가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에 분배받아 갔던 시절을 되새기며 거기서 "생명 본연의 욕구와 충동의 요청에 호응해 나선 진실한 본아(本我)의 현형"을 찾아내는 거기서 우리는 생명의 감동을 감지할 수 있다. 문득 뛰어든 상상의 들 말이 시간의 광야를 질주하면서 느닷없이 마음의 저변에 깔려있던 추억을 건져내어 생명의 진미를 찾아보았던 것이다.
한춘의 수필은 참선(參禪)의 경지를 달리면서도 현실에 뿌리를 둔 그의 시처럼 언제나 충분한 상상의 공간을 던져주고 있다.

2002.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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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춘: 중국 흑룡강조선족작가협회 회장.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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