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객의 심지
-문화심층에 뿌리를 두고 류랑으로 밝혀 가는 한춘의 시를 두고
전경업
가을이 아우성치며 달려오고 있다.
볏단을 추켜든 아낙네들과 풀 모자를 해 쓴 어린이들이 바람처럼 몰려와 시인의 앞에 장벽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모든 전투태세를 갖춘 듯한 엄숙한 표정은 송곳 같은 눈길과 함께 말없이 뚫어지게 지켜본다.
드디어 폭풍이 일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부딪치고 깨어지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폭발하고는 그런 일이 언제 있었더냐 싶게 갑자기 사라져 말끔하다! 먼지도, 함성도, 피도, 무기도 없이 현장은 어느새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고요하고 정적이 깃든 가운데 바로 눈앞의 허공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빛의 무리들이 있다. 그것들이 바로 시다.
오로지 시만이 진 붉은 색과 남색과 노랑색깔의 진주와 보석처럼 반짝이며 공중에서 별처럼 반짝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한춘의 시이다.
당신의 그늘아래서
나는 언제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소소리 높은 절벽
그 정수리에 나붙기는 깃발
별안간 눈물송이사이로
거룩한 부름이 파문 지고 있어요
술 마시고 시 짓고
자식을 키워도
언제나 어린애로만 지켜보는
영원한 정상이 있어요
그래도 그런 소리 못하겠어요
나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그 장담의 말만은 못하겠어요
파랗게 번뜩이는 은빛 비늘
그것은 몽땅 나의 재산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이
모두 내 이름자 밑에 있어요
이는 한춘의 대표시집 "주소 없는 편지" 의 "주소 없는 편지- 17"의 전문이다.
과연 류랑으로 시심을 지펴 가는 한춘은 방랑을 하면서도 언제나 어떤, 이름 모를 권세, 아니면 어떤 절대권력의 압제와 탄압에서 마음을 바장이며 방랑과 정착사이에서 배회하고 해탈과 구속(拘束)사이에서 서성이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의 그늘아래서
나는 언제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시작된 시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문화함의를 시사하고 있다. 우리는 시의 이 첫 련을 읽으면서 자연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탐욕과 시샘으로 점철된 길고도 파란만장한 고난의 인생을 살아왔던 야곱을 떠올리게 된다.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에게 차례졌던 장자권(長子權)을 취득한 야곱은 에서의 보복을 피해 부득불 방랑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떠돌아다니던 중 야곱은 외삼촌인 라반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외삼촌이 살고있는 고장에 도착한 야곱은 우물가에서 쉬다가 마침 양에게 물을 먹이러 온 외삼촌인 라반의 딸, 외사촌 여동생인 라헬을 만나게 되었다. 결국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은 아무리 조카일지라도 그냥 놀고 먹일 수는 없다고 했다. 아릿다운 외사촌여동생인 라헬에게 반한 야곱은 라헬을 자기에게 안해로 줄 수 있다면 자기가 7년동안 봉사하겠다고 했다.
7년이 지나 기한이 차자 야곱은 외삼촌보고 기한이 찾으니 자기 안해 될 라헬을 자기에게 안해로 달라고 했다. 그러나 재물에 눈이 어두운 라반은 구실을 대어 큰딸인 레아를 안해로 주면서 만약 라헬을 안해로 맞으려면 7일을 더 봉사하라고 했다. 그러나 야곱은 7일간 더 봉사하고 라헬을 안해로 맞은 뒤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7년간을 라반을 위해 더 봉사했다.
이 10여년 사이 아들 열 둘을 본 야곱이 어느 날 자기의 외삼촌보고 이제 자기의 처자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을 적에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그냥 자기에게 남아서 자기를 섬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품삯을 따로 정해주겠다고 했다.
이에 야곱은 너무도 억울하여 이렇게 외삼촌에게 호소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지금은)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功力)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의 이 호소는 단순히 재산과 자기의 재산권, 그리고 귀향(歸鄕)을 갈망한 호소만이 아니였다. 그것은 방랑을 종말하려는 그의 마음속깊이에서 우러나온 울부짖음이었으며 자기의 자유와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회귀에 대한 갈망, 그리고 자주적인 인간으로의 정립을 소원한 절절한 부르짖음이었다.
이 시는 지난 세기 80년대 말로부터 1990년까지 사이에 쓰여진 시이다.
이렇게 보았을 적에 한춘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과 해탈,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인간적인 자유를 갈망해 피비린 몸부림을 했음을 볼 수 있다.
밖에서는 봄바람이 훈훈히 불어오고 해빛 화창한 들에는 백화가 만발하지만 집안에는 아직 차가움으로 랭랭하고 지지리한 이데올로기와 자아봉쇄는 아직 개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대상황과 시인의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방랑과 개방된 세상에로의 진출욕구는 하나의 시심(詩心)으로 어울리면서 "당신의 그늘아래서/ 나는 언제면/ 어른이 될 수 있을가요"라고 가슴에 피 터지게 부르짖고 있다.
시인에게서 시와 사회인간에 대한 이런 저런 틀로 구속하는 것은 절대권력의 압제였고 또 그런 압제 속에서 사는 시인이 보기에 "자기"는 어린이에 지나지 않아 그처럼 "어른"이 될 것을 갈망하고 호소했던 것이다.
"소소리 높은 절벽
그 정수리에 나붓기는 기발
별안간 눈물송이 사이로
거룩한 부름이 파문지고 있어요"
저기 저 높이 우뚝 솟은 높은 절벽, 그 정수리에 바람에 힘차게 펄펄 나붓기는 깃발은 무었이었던가?
그것은 고향이었고 그것은 자유였고 그것은 방랑객이 영원히 찾아 헤매면서도 영원히 다달을 수 없는 시향(詩鄕)의 종점이었다.
때문에 그것은 오로지 소소리 높디높아 이를 수 없는 높은 절벽, 그것도 그 정수리에서 펄펄 나붓기는 것이였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는 눈물이 아롱져 솟아오르고 그 아롱진 눈물송이사이로는 거룩한 부름이 파문지고 있다. 바로 자유의 부름이요, 인간 심령의 원초적인 고향에서 울려오는 부름이요 실향민의 세포마다에 각인(刻印)된 향수에서 솟아 나오는 부르짖음이였다. 하기에 그것은 그처럼 그렇게 "거룩"하고 그처럼 사람의 마음에서 눈물을 쥐어짜는 것이다.
과연 사람의 몸에서 눈물을 말끔히 쥐어 짜버린다면 나중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도, 숨결도, 자유도, 사상도 없는 바짝 마른 뼈를 싼 살가죽뿐일 것이다.
인간의 육체에서 물이 90여프로를 차지한다면 인간의 령체에서 눈물은 99%를 차지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체가 물을 떠나서는 살아 숨 쉴 수가 없듯이 인간의 령체도 눈물을 떠난다면 그 생명과 령혼을 잃고 말 것이다.
누군가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피가 아니라 눈물이라고 했다. 피는 사람의 어디를 찌르나 흐르기는 매양 한가지, 그러나 눈물은 오로지 한 곳, 인간 마음의 창문이라는 눈에서만 솟아난다, 그것도 뜨거운 정과 한데 어울릴 적에야 솟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눈물이 피보다 더 소중하다고 한다.
이렇게 말했을 적에 인간이 인간의 영혼을 느꼈을 적에, 영혼을 글로 쓰면 그것이 시라고 한다면 귀로들을 수 있는 소리로 나타나면 그것은 바로 음악이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나타나면 그것이 바로 눈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거룩한 감동에서 오는 영혼의 공명(共鳴)이 바로 눈물인 것이다.
그래서 한춘의 시들에서는 언제나 그 시어들마다에 눈물이 아롱져 맺혀있고 보석처럼 빛나면서 우리 시단에서는 보기 드문, 녀성적인 애수와 애원, 향수와 한을 꽃피우는 것이다.
이런, 자유와 해탈, 초월과 방랑의 추구는 어떤 절대적인 권위의 압체와 음영(陰影)으로 하여 시시각각 시인을 자극하고 또 이런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시인은 시시때때로 자기가 어떤 무형의 거미줄에 포박되어 있음을 육적으로 느끼게도 하는 것이다.
"술 마시고 시 짓고
자식을 키워도
언제나 어린애로만 지켜보는
영원한 정상이 있어요"
이 "영원한 정상"이 바로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절대권위"요, 시인을 포박한 무형의 거미줄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래도 그런 소리 못하겠어요
나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그 장담의 말만은 못하겠어요"
라고 감탄하고 있다.
인간성장의 단계에서 "어린이"는 자연 "어른"에 비해 자유가 적은 것이다. 그만큼 어른들로부터, "영원한 정상"들로부터 구속을 받고 제재를 받고 행동의 감시를 받고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이런 자유의 상실과 이데올로기적인 무형의 거미줄로 이루어진 속박으로 하여 시인 한춘은 항상 자기가 어린애로 느껴졌고 "술 마시고 시 짓고/ 자식을 키우"면서도 또 감이 "어른"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었으며, 또 이로 하여 한춘은 "당신의 그늘아래서/ 나는 언제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라고 부르짖는다.
"파랗게 번뜩이는 은빛 비늘
그것은 몽땅 나의 재산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이
모두 내 이름자 밑에 있어요"
이렇게 한춘은 이 한편의 시를 갈무리하고 있다.
"파랗게 번뜩이는 은빛 비늘"은 바로 시인의 시어요, 시구절이요, 시심인 것이다.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이/ 모두 내 이름자 밑에 있어요"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 창세기"를 떠올리게 된다.
요셉은 바로 성경에서 선하고 위대한 삶의 좋은 모범을 보여준 훌륭한 인물이요, 우에서 말한 야곱의 11번째 아들이다. 바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안해인 라헬의 맏아들이요,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다.
요셉은 17세 되던 해에 형들과 함께 양을 치던 중 하루는 이런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렇지 않아도 야곱이 늘그막에 본 아들이라고 요셉을 특별히 귀여워하여 채색 옷까지 해 입히니 형들이 시기가 심한데 이런 꿈 얘기를 하니 형들은 "그럼 니가 우리들의 왕이 되겠느냐"며 더욱 미워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요셉은 요셉대로 며칠 뒤 다시 또 꿈 얘기를 했다.
"내가 꿈을 꾸니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나에게 절을 하더이다."
그러자 형들은 그러면 "우리 형제들과 어머니 아버지가 너에게 가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하겠느냐?"고 하면서 더욱 미워했다.
얼마 뒤에 형들이 멀리 가서 양을 치게 되었는데 야곱이 요셉더러 형들을 보러 가라고 했다.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본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으나 요셉은 형들인 르우벤과 유다의 도움으로 죽음은 면하고 결국 장사군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춘 시의 이 구절에는 이 시의 첫 구절에 야곱의 이야기가 숨어 있듯이 바로 요셉의 이야기가 함축성있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
외세의 핍박으로 이국으로 팔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요셉, 그의 신세는 어쩌면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신세와 너무나도 근사하다. 여기서 어쩌면 한춘은 우리 민족에 대한 어떤 바램과 기대를 싣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요셉의 몸에서 우리는 한춘의 그런 기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노예로 있으면서도 언제나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험악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지혜와 생명에 대한 끈질긴 집착, 그리고 마를 줄 모르는 향수와 동족에 대한 사랑으로 애굽의 절대통치자인 바로왕의 총리로 되어 애굽인들을 7년 기근에서 구했을 뿐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을 비롯한 12형제를 모두 애굽으로 이끌어내어다 보살펴주었으며 요셉의 이런 구원으로 야곱의 12아들은 결국 후세 이스라엘의 12지파로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는 끈질기게 자기의 리상과 자기 몫을 추구한 야곱에서 시작하여 야곱의 온 족속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12지파를 위해 불후의 업적을 쌓은 요셉에서 끝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춘의 방랑과 갈망과 추구와 이상이 무엇인가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한춘의 시는 이렇게 인류문화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운명과 행정을 자기의 시적 맥락으로 펼쳐 보이고 있으며 또 이런 운명과 새로운 운명에 대한 기대에 따른 끊임없는 방랑으로 초월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2003.05.10.
-문화심층에 뿌리를 두고 류랑으로 밝혀 가는 한춘의 시를 두고
전경업
가을이 아우성치며 달려오고 있다.
볏단을 추켜든 아낙네들과 풀 모자를 해 쓴 어린이들이 바람처럼 몰려와 시인의 앞에 장벽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모든 전투태세를 갖춘 듯한 엄숙한 표정은 송곳 같은 눈길과 함께 말없이 뚫어지게 지켜본다.
드디어 폭풍이 일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부딪치고 깨어지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폭발하고는 그런 일이 언제 있었더냐 싶게 갑자기 사라져 말끔하다! 먼지도, 함성도, 피도, 무기도 없이 현장은 어느새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고요하고 정적이 깃든 가운데 바로 눈앞의 허공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빛의 무리들이 있다. 그것들이 바로 시다.
오로지 시만이 진 붉은 색과 남색과 노랑색깔의 진주와 보석처럼 반짝이며 공중에서 별처럼 반짝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한춘의 시이다.
당신의 그늘아래서
나는 언제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소소리 높은 절벽
그 정수리에 나붙기는 깃발
별안간 눈물송이사이로
거룩한 부름이 파문 지고 있어요
술 마시고 시 짓고
자식을 키워도
언제나 어린애로만 지켜보는
영원한 정상이 있어요
그래도 그런 소리 못하겠어요
나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그 장담의 말만은 못하겠어요
파랗게 번뜩이는 은빛 비늘
그것은 몽땅 나의 재산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이
모두 내 이름자 밑에 있어요
이는 한춘의 대표시집 "주소 없는 편지" 의 "주소 없는 편지- 17"의 전문이다.
과연 류랑으로 시심을 지펴 가는 한춘은 방랑을 하면서도 언제나 어떤, 이름 모를 권세, 아니면 어떤 절대권력의 압제와 탄압에서 마음을 바장이며 방랑과 정착사이에서 배회하고 해탈과 구속(拘束)사이에서 서성이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의 그늘아래서
나는 언제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시작된 시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문화함의를 시사하고 있다. 우리는 시의 이 첫 련을 읽으면서 자연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탐욕과 시샘으로 점철된 길고도 파란만장한 고난의 인생을 살아왔던 야곱을 떠올리게 된다.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에게 차례졌던 장자권(長子權)을 취득한 야곱은 에서의 보복을 피해 부득불 방랑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떠돌아다니던 중 야곱은 외삼촌인 라반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외삼촌이 살고있는 고장에 도착한 야곱은 우물가에서 쉬다가 마침 양에게 물을 먹이러 온 외삼촌인 라반의 딸, 외사촌 여동생인 라헬을 만나게 되었다. 결국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은 아무리 조카일지라도 그냥 놀고 먹일 수는 없다고 했다. 아릿다운 외사촌여동생인 라헬에게 반한 야곱은 라헬을 자기에게 안해로 줄 수 있다면 자기가 7년동안 봉사하겠다고 했다.
7년이 지나 기한이 차자 야곱은 외삼촌보고 기한이 찾으니 자기 안해 될 라헬을 자기에게 안해로 달라고 했다. 그러나 재물에 눈이 어두운 라반은 구실을 대어 큰딸인 레아를 안해로 주면서 만약 라헬을 안해로 맞으려면 7일을 더 봉사하라고 했다. 그러나 야곱은 7일간 더 봉사하고 라헬을 안해로 맞은 뒤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7년간을 라반을 위해 더 봉사했다.
이 10여년 사이 아들 열 둘을 본 야곱이 어느 날 자기의 외삼촌보고 이제 자기의 처자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을 적에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그냥 자기에게 남아서 자기를 섬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품삯을 따로 정해주겠다고 했다.
이에 야곱은 너무도 억울하여 이렇게 외삼촌에게 호소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지금은)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功力)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의 이 호소는 단순히 재산과 자기의 재산권, 그리고 귀향(歸鄕)을 갈망한 호소만이 아니였다. 그것은 방랑을 종말하려는 그의 마음속깊이에서 우러나온 울부짖음이었으며 자기의 자유와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회귀에 대한 갈망, 그리고 자주적인 인간으로의 정립을 소원한 절절한 부르짖음이었다.
이 시는 지난 세기 80년대 말로부터 1990년까지 사이에 쓰여진 시이다.
이렇게 보았을 적에 한춘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과 해탈,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인간적인 자유를 갈망해 피비린 몸부림을 했음을 볼 수 있다.
밖에서는 봄바람이 훈훈히 불어오고 해빛 화창한 들에는 백화가 만발하지만 집안에는 아직 차가움으로 랭랭하고 지지리한 이데올로기와 자아봉쇄는 아직 개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대상황과 시인의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방랑과 개방된 세상에로의 진출욕구는 하나의 시심(詩心)으로 어울리면서 "당신의 그늘아래서/ 나는 언제면/ 어른이 될 수 있을가요"라고 가슴에 피 터지게 부르짖고 있다.
시인에게서 시와 사회인간에 대한 이런 저런 틀로 구속하는 것은 절대권력의 압제였고 또 그런 압제 속에서 사는 시인이 보기에 "자기"는 어린이에 지나지 않아 그처럼 "어른"이 될 것을 갈망하고 호소했던 것이다.
"소소리 높은 절벽
그 정수리에 나붓기는 기발
별안간 눈물송이 사이로
거룩한 부름이 파문지고 있어요"
저기 저 높이 우뚝 솟은 높은 절벽, 그 정수리에 바람에 힘차게 펄펄 나붓기는 깃발은 무었이었던가?
그것은 고향이었고 그것은 자유였고 그것은 방랑객이 영원히 찾아 헤매면서도 영원히 다달을 수 없는 시향(詩鄕)의 종점이었다.
때문에 그것은 오로지 소소리 높디높아 이를 수 없는 높은 절벽, 그것도 그 정수리에서 펄펄 나붓기는 것이였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는 눈물이 아롱져 솟아오르고 그 아롱진 눈물송이사이로는 거룩한 부름이 파문지고 있다. 바로 자유의 부름이요, 인간 심령의 원초적인 고향에서 울려오는 부름이요 실향민의 세포마다에 각인(刻印)된 향수에서 솟아 나오는 부르짖음이였다. 하기에 그것은 그처럼 그렇게 "거룩"하고 그처럼 사람의 마음에서 눈물을 쥐어짜는 것이다.
과연 사람의 몸에서 눈물을 말끔히 쥐어 짜버린다면 나중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도, 숨결도, 자유도, 사상도 없는 바짝 마른 뼈를 싼 살가죽뿐일 것이다.
인간의 육체에서 물이 90여프로를 차지한다면 인간의 령체에서 눈물은 99%를 차지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체가 물을 떠나서는 살아 숨 쉴 수가 없듯이 인간의 령체도 눈물을 떠난다면 그 생명과 령혼을 잃고 말 것이다.
누군가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피가 아니라 눈물이라고 했다. 피는 사람의 어디를 찌르나 흐르기는 매양 한가지, 그러나 눈물은 오로지 한 곳, 인간 마음의 창문이라는 눈에서만 솟아난다, 그것도 뜨거운 정과 한데 어울릴 적에야 솟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눈물이 피보다 더 소중하다고 한다.
이렇게 말했을 적에 인간이 인간의 영혼을 느꼈을 적에, 영혼을 글로 쓰면 그것이 시라고 한다면 귀로들을 수 있는 소리로 나타나면 그것은 바로 음악이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나타나면 그것이 바로 눈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거룩한 감동에서 오는 영혼의 공명(共鳴)이 바로 눈물인 것이다.
그래서 한춘의 시들에서는 언제나 그 시어들마다에 눈물이 아롱져 맺혀있고 보석처럼 빛나면서 우리 시단에서는 보기 드문, 녀성적인 애수와 애원, 향수와 한을 꽃피우는 것이다.
이런, 자유와 해탈, 초월과 방랑의 추구는 어떤 절대적인 권위의 압체와 음영(陰影)으로 하여 시시각각 시인을 자극하고 또 이런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시인은 시시때때로 자기가 어떤 무형의 거미줄에 포박되어 있음을 육적으로 느끼게도 하는 것이다.
"술 마시고 시 짓고
자식을 키워도
언제나 어린애로만 지켜보는
영원한 정상이 있어요"
이 "영원한 정상"이 바로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절대권위"요, 시인을 포박한 무형의 거미줄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래도 그런 소리 못하겠어요
나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그 장담의 말만은 못하겠어요"
라고 감탄하고 있다.
인간성장의 단계에서 "어린이"는 자연 "어른"에 비해 자유가 적은 것이다. 그만큼 어른들로부터, "영원한 정상"들로부터 구속을 받고 제재를 받고 행동의 감시를 받고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이런 자유의 상실과 이데올로기적인 무형의 거미줄로 이루어진 속박으로 하여 시인 한춘은 항상 자기가 어린애로 느껴졌고 "술 마시고 시 짓고/ 자식을 키우"면서도 또 감이 "어른"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었으며, 또 이로 하여 한춘은 "당신의 그늘아래서/ 나는 언제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라고 부르짖는다.
"파랗게 번뜩이는 은빛 비늘
그것은 몽땅 나의 재산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이
모두 내 이름자 밑에 있어요"
이렇게 한춘은 이 한편의 시를 갈무리하고 있다.
"파랗게 번뜩이는 은빛 비늘"은 바로 시인의 시어요, 시구절이요, 시심인 것이다.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이/ 모두 내 이름자 밑에 있어요"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 창세기"를 떠올리게 된다.
요셉은 바로 성경에서 선하고 위대한 삶의 좋은 모범을 보여준 훌륭한 인물이요, 우에서 말한 야곱의 11번째 아들이다. 바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안해인 라헬의 맏아들이요,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다.
요셉은 17세 되던 해에 형들과 함께 양을 치던 중 하루는 이런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렇지 않아도 야곱이 늘그막에 본 아들이라고 요셉을 특별히 귀여워하여 채색 옷까지 해 입히니 형들이 시기가 심한데 이런 꿈 얘기를 하니 형들은 "그럼 니가 우리들의 왕이 되겠느냐"며 더욱 미워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요셉은 요셉대로 며칠 뒤 다시 또 꿈 얘기를 했다.
"내가 꿈을 꾸니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나에게 절을 하더이다."
그러자 형들은 그러면 "우리 형제들과 어머니 아버지가 너에게 가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하겠느냐?"고 하면서 더욱 미워했다.
얼마 뒤에 형들이 멀리 가서 양을 치게 되었는데 야곱이 요셉더러 형들을 보러 가라고 했다.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본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으나 요셉은 형들인 르우벤과 유다의 도움으로 죽음은 면하고 결국 장사군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춘 시의 이 구절에는 이 시의 첫 구절에 야곱의 이야기가 숨어 있듯이 바로 요셉의 이야기가 함축성있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
외세의 핍박으로 이국으로 팔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요셉, 그의 신세는 어쩌면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신세와 너무나도 근사하다. 여기서 어쩌면 한춘은 우리 민족에 대한 어떤 바램과 기대를 싣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요셉의 몸에서 우리는 한춘의 그런 기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노예로 있으면서도 언제나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험악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지혜와 생명에 대한 끈질긴 집착, 그리고 마를 줄 모르는 향수와 동족에 대한 사랑으로 애굽의 절대통치자인 바로왕의 총리로 되어 애굽인들을 7년 기근에서 구했을 뿐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을 비롯한 12형제를 모두 애굽으로 이끌어내어다 보살펴주었으며 요셉의 이런 구원으로 야곱의 12아들은 결국 후세 이스라엘의 12지파로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는 끈질기게 자기의 리상과 자기 몫을 추구한 야곱에서 시작하여 야곱의 온 족속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12지파를 위해 불후의 업적을 쌓은 요셉에서 끝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춘의 방랑과 갈망과 추구와 이상이 무엇인가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한춘의 시는 이렇게 인류문화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운명과 행정을 자기의 시적 맥락으로 펼쳐 보이고 있으며 또 이런 운명과 새로운 운명에 대한 기대에 따른 끊임없는 방랑으로 초월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2003.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