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력사의 현실
--안수길 단편소설"새벽"이 보여주는 현실의 력사를 두고
과연 이것이 우리의 력사였던가?
과연 이것이 우리가 살아온 길이었던가?
우리는 "내"가 구경 누군 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살아왔던가?
"나"의 "아버지"는 열심히 살려고 했고 또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간도로 왔고 남보다 일도 더 힘겹게, 많이 했고 농사도 잘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외계의 압력과 그 자신의 제한으로 말미암아 가정을 살려내고 "복동예"를 박치만의 마수에서 건져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열심히, 그리고 갖은 방법을 다해 가정을, 자기를, 그리고 "복동예"를 박치만의 손에서 빼내려 모지름을 쓴다.
"아버지"는 자기의 힘으로 얼마든지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농사로는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을 했을 적에는 목숨을 걸고 하는 소금 밀수를 하게 된다. 결국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빚은 빚으로 더 늘어나 박치만의 손아귀에 잡히게 되고 결국 "설마"하고 볼모로 내놓았던 딸을 소실로 들어 보내야 되는 험경에 처하게 된다.
그것이 단순히 력사과정의 외계환경(일제의 통치로 이민을 하고 생소한 땅에서 남의 집 소작농사를 짓는)으로 인한 것 만이었던가?
"아버지"의 비극을 결국 자아 방치와 외계의 힘에 의해 자기를 구원하려는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외적인 요인의 작용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버지"의 주관적인 원인으로 보았을 적에 결국은 이런 적절하지 못한 행위방식으로 비극이, 딸이 죽고 안해가 미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법이 어떤 한 통치계급의 기득권유지를 위한 수단이 아닌 인간사회 기본유지의 필수적인 메카니즘과 사회구조의 필요로 보았을 적에 "아버지"가 택한 소금밀수를 우리는 생존을 위한 "자아방치"로밖에 볼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법"을 어기자, 이런 심산인 것이다.
환경이 어떠하든 인간은 모두 자기의 행위방식을 자유로 선택할 수 있다는 실존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아버지"는 소금 밀수가 아닌 다른 방식을 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금밀수의 합법성과 필연성을 제쳐놓고 "아버지"가 조선에서 "간도"로 이민을 올 때부터가 문제가 되는 것이며 또 이 "이민"의 시행착오는 결국 소금밀수의 필연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나아가 비극을 낳는 씨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이사를 올적부터 "아저씨"를 믿고 왔으며 이사를 와서는 모든 것을 빚 내여 쓰자는 마음을 가지고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타산을 가지고 왔기에 쌀도 꾸고 세집도 맡고 소도 빌리고 한다. 이런 시행착오는 선천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기에 박치만의 "흉계"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박치만이 딸을 소실로 맞아들이겠다고 할 때도 "아버지"는 그것을 어떻게 자기의 힘으로 처리할 것인가를 궁리할 대신 "호씨"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물론 "호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마음씨 곱고 도량이 너르고 선량한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호가도 "아버지"와 박치만 사이의 "계약"에는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스스로 빚은 대가는 온 집 식구들이 함께 치러야 했다. "아저씨"도, 마을 사람들도, "호씨"도 어쩔 수 없었고 또 그 시비거리에 말려들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살림살이부터 "아저씨"나 "박치만"이나 "호가"의 힘을 빌려고 하지 말았어야 하며 사건이 벌어진 다음은 더구나 남의 힘을 빌 수 없게 되었다. 자아생존우위가 인간본성이고 보면 그들의 처사를 나무람하기보다는 자기의 입지를 바로 해야 하며 시작부터 생존구원의 방법을 자기에게서 찾았어야 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엉뚱하듯이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 고향에 있었던 "청소"라는 늪에 얽힌 사연을 떠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룡이 되려는 늪 지기 구렝이를 위해 해마다 소녀를 한 명씩 바쳤다. 소녀 백 명을 바치면 구렝이가 용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구렝이가 용이 되면 농사가 잘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은 백 명을 바쳤으나 마지막 소녀가 "불결하다"는 이유 하나로 마을은 구 년의 대흉과 삼 년의 대역을 치르게 되며 해마다 그 늪에 한 사람씩 빠져 죽게 된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도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나같이 뭉쳐 구렝이를 잡아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구렝이를 소멸할 대신 소녀를 바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더 쉽고 안일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구렝이를 소멸하는 길에 누군가는 생명을 바쳐야 할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소녀를 바치는 편이 퍽 쉬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녀를 바치려면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의 딸을 바치지 않겠다고 싸워야 할 것이고 구렝이를 잡으려면 마을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구렝이와 싸우면 된다. 말하자면 마을 사람들은 내란을 택하든지 아니면 외적과 싸우던지 하나를 책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의 비극은 바로 내란을 택한 데 있는 것이다. 바치는 사람은 바치는 사람대로 소녀를 바치면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리라 생각을 했겠지만, 그러나 소녀를 바친 뒤의 결과는 아리숭한 것이지만 구렝이를 잡으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복이 떨어질 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재앙은 없어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선택도 이와 비슷했다. 그는 자기의 실력을 기초한 이민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남의 힘을 빌려고 한데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보았을 적에 안수길의 단편소설 "새벽"은 력사의 재현과 력사의 현실로가 아니라 오늘 현실의 력사로 본다면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는 더 유익할 지도 모를 일이다.
--안수길 단편소설"새벽"이 보여주는 현실의 력사를 두고
과연 이것이 우리의 력사였던가?
과연 이것이 우리가 살아온 길이었던가?
우리는 "내"가 구경 누군 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살아왔던가?
"나"의 "아버지"는 열심히 살려고 했고 또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간도로 왔고 남보다 일도 더 힘겹게, 많이 했고 농사도 잘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외계의 압력과 그 자신의 제한으로 말미암아 가정을 살려내고 "복동예"를 박치만의 마수에서 건져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열심히, 그리고 갖은 방법을 다해 가정을, 자기를, 그리고 "복동예"를 박치만의 손에서 빼내려 모지름을 쓴다.
"아버지"는 자기의 힘으로 얼마든지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농사로는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을 했을 적에는 목숨을 걸고 하는 소금 밀수를 하게 된다. 결국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빚은 빚으로 더 늘어나 박치만의 손아귀에 잡히게 되고 결국 "설마"하고 볼모로 내놓았던 딸을 소실로 들어 보내야 되는 험경에 처하게 된다.
그것이 단순히 력사과정의 외계환경(일제의 통치로 이민을 하고 생소한 땅에서 남의 집 소작농사를 짓는)으로 인한 것 만이었던가?
"아버지"의 비극을 결국 자아 방치와 외계의 힘에 의해 자기를 구원하려는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외적인 요인의 작용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버지"의 주관적인 원인으로 보았을 적에 결국은 이런 적절하지 못한 행위방식으로 비극이, 딸이 죽고 안해가 미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법이 어떤 한 통치계급의 기득권유지를 위한 수단이 아닌 인간사회 기본유지의 필수적인 메카니즘과 사회구조의 필요로 보았을 적에 "아버지"가 택한 소금밀수를 우리는 생존을 위한 "자아방치"로밖에 볼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법"을 어기자, 이런 심산인 것이다.
환경이 어떠하든 인간은 모두 자기의 행위방식을 자유로 선택할 수 있다는 실존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아버지"는 소금 밀수가 아닌 다른 방식을 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금밀수의 합법성과 필연성을 제쳐놓고 "아버지"가 조선에서 "간도"로 이민을 올 때부터가 문제가 되는 것이며 또 이 "이민"의 시행착오는 결국 소금밀수의 필연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나아가 비극을 낳는 씨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이사를 올적부터 "아저씨"를 믿고 왔으며 이사를 와서는 모든 것을 빚 내여 쓰자는 마음을 가지고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타산을 가지고 왔기에 쌀도 꾸고 세집도 맡고 소도 빌리고 한다. 이런 시행착오는 선천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기에 박치만의 "흉계"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박치만이 딸을 소실로 맞아들이겠다고 할 때도 "아버지"는 그것을 어떻게 자기의 힘으로 처리할 것인가를 궁리할 대신 "호씨"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물론 "호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마음씨 곱고 도량이 너르고 선량한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호가도 "아버지"와 박치만 사이의 "계약"에는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스스로 빚은 대가는 온 집 식구들이 함께 치러야 했다. "아저씨"도, 마을 사람들도, "호씨"도 어쩔 수 없었고 또 그 시비거리에 말려들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살림살이부터 "아저씨"나 "박치만"이나 "호가"의 힘을 빌려고 하지 말았어야 하며 사건이 벌어진 다음은 더구나 남의 힘을 빌 수 없게 되었다. 자아생존우위가 인간본성이고 보면 그들의 처사를 나무람하기보다는 자기의 입지를 바로 해야 하며 시작부터 생존구원의 방법을 자기에게서 찾았어야 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엉뚱하듯이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 고향에 있었던 "청소"라는 늪에 얽힌 사연을 떠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룡이 되려는 늪 지기 구렝이를 위해 해마다 소녀를 한 명씩 바쳤다. 소녀 백 명을 바치면 구렝이가 용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구렝이가 용이 되면 농사가 잘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은 백 명을 바쳤으나 마지막 소녀가 "불결하다"는 이유 하나로 마을은 구 년의 대흉과 삼 년의 대역을 치르게 되며 해마다 그 늪에 한 사람씩 빠져 죽게 된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도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나같이 뭉쳐 구렝이를 잡아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구렝이를 소멸할 대신 소녀를 바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더 쉽고 안일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구렝이를 소멸하는 길에 누군가는 생명을 바쳐야 할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소녀를 바치는 편이 퍽 쉬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녀를 바치려면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의 딸을 바치지 않겠다고 싸워야 할 것이고 구렝이를 잡으려면 마을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구렝이와 싸우면 된다. 말하자면 마을 사람들은 내란을 택하든지 아니면 외적과 싸우던지 하나를 책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의 비극은 바로 내란을 택한 데 있는 것이다. 바치는 사람은 바치는 사람대로 소녀를 바치면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리라 생각을 했겠지만, 그러나 소녀를 바친 뒤의 결과는 아리숭한 것이지만 구렝이를 잡으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복이 떨어질 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재앙은 없어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선택도 이와 비슷했다. 그는 자기의 실력을 기초한 이민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남의 힘을 빌려고 한데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보았을 적에 안수길의 단편소설 "새벽"은 력사의 재현과 력사의 현실로가 아니라 오늘 현실의 력사로 본다면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는 더 유익할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