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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아, 왜 우리가 경주 자동차처럼 살아야하는가?

  • 김형효
  • 조회 3238
  • 2005.09.05 20:09
--이제 천천히 어슬렁어슬렁 살아보자.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미래란 절망 그 자체다. 현대를 아니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미래를 희망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몇몇이나 될까?

보면 볼수록 절망의 깊이에 빠져드는 사람들, 사색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깊숙히 산골이나 깊은 농어촌으로 숨어들어간 사람들에 그림자가 더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 옛 시절 난리를 피해 지리산 깊숙히 이상향의 삶을 찾아 숨어들었던 사람들처럼 우리가 다 숨어들어 살아야 하는가?

지금 이 시대 첨단 멀티 미디어 시스템이 가동되고 테크노시대, 사이버 대륙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더 깊은 산속 더 어두운 골짝을 찾아들기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들은 그들을 일컬어 무기력증에 걸린 자본주의 현대사회의 폐륜아 취급을 하고 있다.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다. 적어도 병상에 누워 바라보았던 내 지난 날들은 그렇다. 사고를 당해 병상에서 돌아본 지난 삶을 통해 지금이야말로 더 깊이 사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필자는 사람, 사람을 노래 부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관성의 지배를 받은 사람처럼 말에 익숙한 사람 사랑이 진실로 사람들의 내면에 스미게 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는지 의문이다. 그렇게 살지 못했었다는 후회가 든다.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조차 쉬어갈 곳에서 쉬어가야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건마는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생각할 때 차근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현재의 세상살이를 더욱 각박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란 생각이다. 이제라도 내가 살아온 서른 여섯 해의 삶을 반추해서 다시 천천히 살 것을 기약한다.

지난 7개월 전 필자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사이에서 서울로 밀려들다가 갓길에서 튀어나온 승용차에 부딪히고 잠시동안 의식을 잃었다. 어느새 7개월이 지났다. 아직까지 누가 나를 향해 무한질주를 감행했던지, 누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타인의 품안에 자신의 목숨을 던진 것인지, 내게 내가 살아갈 미래를 예측할 여력조차 주지않고 내 삶의 생사(生死)유무를 결정하려한 것인지, 나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인지, 내가 사라지고 수많은 타인이 내 삶을 대행해 나가는지를 숙고하게 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는 어쩌면 진한 휴머니티를 상실한 사람들 안에서 태동하고 있다는 것, 거기 자본과 문명없이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슬픈 현실을 인정하며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 살며시 찾아올 미래에 대한 기약도 해볼 여지는 있는 것이리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진한 휴머니티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진한 휴머니티란 이 시대에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것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틈 안에서 의미없는 바람결에 불과하다.

이 시대에 사람은 없다. 무한경쟁시대, 사람은 없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쟁취하고 쟁취해서 무엇을 하는가? 가족이 먹고 사회가 국가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일하며 바쁘다하며 서로를 잡아먹는다.

자, 이제 전면부정하자! 자신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미래란 예측할 수도 없고 미래란 말을 입에 올릴 수도 없이 초라해지고 말리라. 정녕 우리가 미래를 바라볼 마음이 있다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스스로가 카멜레온의 가면을 벗어야 하리라! 병상 3개월 동안에 지난 나의 삶과 현재의 삶의 구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부조리 안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스스로가 자신의 부조리 안에 갇혀 있다. 우리가 어려서 청년의 정의에 대해서 그토록 염원하던 모습을 잃어버린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아니 지금 내가 뻔뻔할 만큼 당당해져버린 정의에 대한 정체성을 상실한 나의 모습에서 후회에 찬 눈물을 흘릴 수도 없이 되어버렸다. 나도 느리게 살지 못하고 빠르게 살려고도 못하였구나.

이제 정의를 위해 죽을 위인은 없다. 정의를 가장한 평화의 사도가 거리에 넘실대고 있다. 이 겨울에도 우리는 반성할 줄 모르고 살아갈 것인가 선택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누구도 자신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도망쳐야한다. 잠잠해져야한다. 멈춰야한다. 잠자듯 꾸물거려 볼 일이다. 이제 그만 추근덕거리고 스멀스멀 젖어들어야 한다. 이제 자꾸자꾸 포기해야한다.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제 가던 모든 길에서 멈춰 서서 다시 갈 길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때 나도 떠도는 아이, 유랑아의 애닲던 모습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질기게 우리가 인간에 대해 믿음의 끈을 붙잡으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후의 인간적 휴머니티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현대인이 방랑과 혼돈에서 벗어나 바르게 서로를 바라보고 바로 보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어렵지만 이 힘겨운 시대를 온몸을 절규하듯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이란 생각이다. 거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현실조차 때때로 우리에게 낯선 유랑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나는 몇 해 전 나의 어린 조카의 눈에 비친 어제의 달과 오늘의 달을 보며 그런 희망을 갖게 되었다. 너무나도 비과학적인 그러나 과학적인가 아닌가를 이야기하는 자체에 의미마저 무의미하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풍토야말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달이 서로 다른 위치에 떠 있음을 보고 "어! 삼촌 달이 이사했네! 간단 명료하게 본 그대로를 이야기해내는 어린 조카의 모습이 그저 천진난만한 아이의 음성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진실이구나. 그래 이렇게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구나.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언제나 준비된 현대인의 유랑을 암시해주는 이야기로 들렸다.

진실의 거리에서 멀어진 우리가 아이의 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만큼 패배하면서 우리는 너무도 가혹한 부정의 벽을 실감하고 감내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감내하지 않아도 될 것조차 감내하는 그런 순간이다. 바로 그런 어줍은 유랑의 한 귀퉁이에 오두마니 앉아서, 혹은 누워서 객지 나간 자식들이 오가는 고향이라는 폐쇄공간 혹은 무한대로 열린 공간에 대한 현대인들의 세속적인 관계망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의 굴레에서 인간을 배반해왔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필자 자신이 배반하는 고향이라는 공간도 이야기하고자 했다. 우리 모두의 고향, 인간의 고향은 우리들 서로의 가슴과 가슴 안에 애닲은 모습을 하고 있다. 어쩌면 고향 길 삼거리나 잿등 마루, 찻머리에 올라앉아 객지 나간 자식 걱정에 해 떨어지는 어머니 가슴속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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