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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규동 선생님과의 만남

  • 김형효
  • 조회 6035
  • 2009.11.13 07:22
김규동 시인

약력
1925년 함북 종성 출생
1947년 연변의과대학 수료
1948년 평양종합대학교 중퇴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시 <강>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옴
1951년~53년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시 운동 전개
1955년 첫 시집<나비와 광장>이후
<현대의 신화>, <죽음 속의 영웅>, <깨끗한 희망>, <오늘도 기러기떼는>, <느릅나무에게>등의 시집
1962년 <지성과 고독의 문학>, <지폐와 피아노>,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
<어머님 전상서>, <시인의 빈손> 外
자유문인협회상, 은관문화훈장, 만해문학상 수상


행운이면서 내게는 숙명 같은 만남이라는 생각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
필자가 김규동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육군 병장으로 군대를 제대한 후 방송대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다.
나이 26세 문학청년......, 사실 필자는 그 이전까지
문학에는 입문할 뜻도 없었고 그럴 만한 지식도 없었다.
내게 그런 문학적 감성이나 책을 가까이해서 문학의 참 맛을 글의 참 맛을 느껴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이만저만 지진하고 부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존심 때문에 군대 지원을 하고 30개월 만기 전역을 한 후 군대 생활 중
고참 한 사람이 나중에 시인이 되어보라는 말을 하길래 그 말을 믿고 그래 한 번 해볼까?
그렇게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방송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을 했다.
물론 꼭 문학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당시만해도 내게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 먼저 기자가 되어보자고
그래서 국문학을 전공하면 기자로도 진출할 수 있다는 입학전형서를 본 후
기자를 지망하되 문학에도 한 번 관심을 갖고 접근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필자는 중졸에 군대 지원을 했고 530 주특기인 보일러병이라서
대대본부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 대대본부에는
나와 또 다른 고참인 김찬*이라는 두 사람만 중졸이었고
모두가 초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들이 행정 업무를 주로 보았다.
물론 필자는 나중에 독학으로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군대 생활중 고교과정을 마쳤다.
그런데 그중에 고참들이 내게 편지를 대필시키기도 하고
또 내가 여고생이나 여대생으로 부터 받은 위문편지를 보내면 백이면 백 답장을 해왔기에
고참들로 부터 인기를 얻었던 터라 내 문장력에 대한 자부심도 갖을 수 있었다.
그런데 김용*이라는 믿음직한 고참 한 분이 어느날
내게 너는 나중에 시인이 되어보라며 신중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귓등으로 들었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내게 운명처럼 그 분의 뜻대로 대학을 선택하고
또 그 길로 곧장 문학동인회를 찾을 때까지도 난 문학과 삶을 함께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어느 덧 20여년의 내 삶의 이력을 함께하고 있으니
갓 불혹을 넘긴 나이를 생각하면 현재의 내 삶의 반평생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튼 1990년 방송대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풀밭 동인회라는 곳을 찾으면서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실오라기 같은 희망의 등불을 켜고 작품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지하고 부진한 내 몰골은 곧 그 본색이 드러나고 모자란 문학적 지식이 날 괴롭혔다.
이른바 합평회라는 것을 하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몸둘 바를 몰라 했고
한참 성갈도 있던 나이에 젊은 혈기가 왕성했던 때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한 일이다.
평상시 사소한 일에도 곧잘 분개하고 자리를 박차는 습성이 몸에 밴 내가
문학을 평하고 논하는 그곳에서는 낮은 포복을 하듯 납작엎드려
동인들의 말에 귀를 귀울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하던대로 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때 그 동인들을 통해서 난 김규동 선생님의 이름을 알았고
그 존재가 대학국어에서도 거명이 되는 문인임을 알았다.
난생 처음 접하던 이름들이 거의 모든 문인들이다.
김기림, 정지용, 신경림, 고은, 정희성, 김준태, 조태일, 김지하, 박노해.......,
대단히 큰 사건이 되어 뉴스에서나 얼핏 들었던 시인들 말고
또 오래전 교과서에서 접했던 한용운 선생이나 이육사,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그렇게 문학세계에 명망가들의 이름을 접하면서 판을 알아가던 때다.
 
90년 겨울까지 난 참 많은 독서를 하게 되었다.
아마도 일년 상간에 문학서적을 600여권을 읽었던 것 같다.
그 이듬해에는 1000여권을 읽었고 그 다음해에는 이제 골라서 책을 사보기도 했다.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는 그때가 아닌가 싶다.
당시 나는 아파트 보일러실에 벙커C유를 다루면서 밤을 세우곤 했다.
격일 근무라서 시간은 많은 편이었으나, 방송대 국문과 학생회 학년 총무를 맡아 아주 바빴다.
하지만 보통의 직장인들보다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합평회에서도 가끔이지만
합평회에서의 나의 발언을 놀랍게 바라보는 동인들의 박수도 받곤 했다.

그해 겨울 나는 왕성한 창작을 했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의 발전에 내가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마치 말문이 열린 어린 아이가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둘러 앉은 방안에서
대화를 주도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해 겨울 난생 처음으로 방송대 문학상에 응모를 했다.
처음이었던 문학상 응모와 나의 첫 서사시는 나의 가족사와 어우러진 민족사였다.
자그만치 1000행이 넘는 장시도 그때 처음 쓰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품이 이른바 최종심에 올랐다는 것이다.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나로서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 풀밭동인회에 작품이라고 써낸 작품을 두고
합평회에서 한 동인은 작품이 아니다라고 직설적으로 평을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런 평에도 난 가타부타 불평도 못하고 서글피 그 평을 듣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혈기방창하던 청년의 기개는 어디로 갔던 것일까?
 
꿈만 같은 작품평을 받아든 나는 정말이지 뛸듯이 기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경험했다.
그리고 마치 그해 겨울 교육방송 개국특집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는 행운도 누렸다.
당시 나는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그 중 문학기행을 다니는 모임에 다니면서
문학기행문을 학보에 투고하고는 했다.
몇 차례의 투고로 원고가 채택이 되어 학보에 실리는 것은 또 다른 쾌감을 주었다.
그런 학보를 본 교육방송 PD에 의해 "우리들의 겨울기행"이라는 프로그램에 메인게스트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의 맨 마지막을 나의 시가 장식하기도 했다.
먼 훗날 시인의 약속같은 시였다.
 
아무튼 그 방송대 문학상 최종심에서 김규동 선생님은 내게 상을 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학보사 전영* 문화부 기자분을 통해 짧은 편지를 전해주시고는 분발을 주문하셨다.
천군만마 이상의 영광을 맛본 느낌이었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이미 난 김규동 선생님의 포로처럼 선생님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다양한 영역의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기억된다.
나름 다양한 이론을 접하며 리얼리즘적인 작품과 쉬르리얼리즘, 그리고 모던과 포스트모던에까지
나름 닥치는 대로 실험을 해대면서 작품을 창작했었다.
 
그리고 그해 나름이 목표를 세운 것이 나는 꼭 방송대학교 문학상을 받아내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계속적으로 최종심에 문턱에서 미끄러지는 훈련만 했다.
그렇게 5년 후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나 보다 안되는 가 보다.
그렇게 5년 후 겨울 날 난 김규동 선생님에게 그 동안의 내 결심과 작품 25편을 편지와 함께 보냈다.
내 결심이라는 것은 반드시 방송대 문학상을 받고 선생님을 찾아뵙겠다는 다짐이었다.
마치 우물에 빠져 허우적이던 사람을 구해주신 것처럼
맨 처음 심사평에 힘을 얻어 열심히 창작해왔다는 것
그리고 그리 노력을 했지만, 문학상이라는 것이
신기루처럼 멀게만 느껴져서 더는 어려운 것 같다는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답신을 주시면서 한번 볼 것을 청하셨다.
그리고 작품을 더 가져오라시더니 후일 내가 추천을 할테니 그냥 시집을 내라!
그러면서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시인이 누구 허락맡고 시인하겠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등단 제도에 얽매여서 언제까지 그렇게 주저앉아만 있을 것이냐?라고 질책까지 하셨다.
그때 그런 말씀을 듣고 나오면서도 주저주저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곱씹어보니 시인은 당당하게 자기발언을 하는 주체로서
나는 이렇게 발언한다는 시인적 선언 같은 것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자꾸 뇌리를 자극했다.
그리고 함께 동행했던 출판사 사장과 선배 시인의 자문을 듣고 출판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첫 시집인 "사람의 사막에서"라는 책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아니 그후 여러차례 선생님과의 만남을 갖을 수 있었고
그때마다 선생님은 놀라운 가르침들을 주셨다.
 
"시인은 발명가 에디슨이어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은 항상 날 채찍질한다.
그리고 항상 날 가혹하게 다듬질 하는 말씀은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하라!"
좀 더 세게 말씀하시면 "남이 하지 않은 일만 하라!
왜 남들이 한 일, 남이 하늘 일을 하느냐! 그것은 시인이 할 일이 아니다."
버거운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빈민같은 처지의 내게는 정말로 가혹한 채찍질이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 가르침의 정신을 따라 현대를 사는 나는 감히 과거 조선시대 선비처럼 살아가는 힘을 얻었다.
사실 현재의 삶, 현대를 사는 사람의 삶으로 보면 많은 모자람을 감수해야 하는 삶이다.
하지만, 한 번 사는 것이 인생이고
그 인생을 통해서 한 번 얻을 수 있는 보람된 삶의 여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삶은 아니니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내 삶의 주인으로서 당당한 사표가 있어 행복하다.
 
체중 48KG을 한참 유지해오셨지만,
현재의 체중은 38KG을 전후한 상태시다.
그러나 시인의 말이 시인의 글이 체중의 경중으로 가볍고 무거운 것이랴!
그 어느 누구보다 무겁고 강한 깊이와 넓은 시의 바다에
항해하는 발명가 에디슨의 길을 가시는
선생님의 손을 맞잡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필자는 기쁜 시인이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은 안녕하신지 염려가 깊다.
우크라이나에서 한 번 전화를 드렸고 통화를 했지만,
항상 겁이 나서 전화를 드리지도 못한다.
그저 안녕하시기를 빌 뿐,
내일은 날이 밝으면 전화를 꼭 드려야겠다.
 

아래 시는 김규동 선생님의 작품이다.
항상 가슴 아리게 분단을 아파하시는 선생님의 아련한 추억도 아프다.
 
두만강에 두고 온 작은 배

가고 있을까
나의 작은 배
두만강에

반백년
비바람에
너 홀로

백두산 줄기
그 강가에
한줌 흙이 된 작은 배


아, 통일

이 손
더러우면
그 아침
못 맞으리

내 넋
흐리우면
그 하늘
쳐다 못 보리

반백년 고행길 걸은
형제의 마디 굵은 손
잡지 못하리
 
이 손 더러우면
내 넋 흐리우면
아, 그것은
영원한 죽음.


나눔의 경이
 
아이는
사탕과자를 넣고 나가더니
동네 아이들한테
다 나눠주고 나서
어, 내 건 하나도 없어
하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빨갛게 언 두 볼이
나긋나긋했다
 
자선사업가가 자선을
이 아이같이 했을 때의 경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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