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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 머금은 창문--빛고을을 떠나오며

  • 김형효
  • 조회 3550
  • 2005.09.17 11:19
물기 머금은 창문에 비추는 푸른빛 산야를 거슬러 빛고을을 떠난 열차가 불량한 도시 서울을 향해 간다. 어느 구석에선가 낯선 기억을 더듬는 사람이 있을 테고, 나는 불량한 도시를 향하여 망연자실한 몸으로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낮은 산등성이조차 휘감은 비구름, 마치 유령의 살갗을 더듬고 있는 것처럼 음산하다. 도시의 개량할 수 없는 불빛들이 불량한 사람을 생산하듯이 저 산등성이 휘감은 구름도 무엇을 생산하고 있으련마는 그것이 도시의 불량함과는 다를 것을 기대해도 좋을까?

간간히 낯설음에 놀랜 아이의 울음소리에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이 거친 문명의 틈 안에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어제의 날 빛을 잊고 오늘의 날 빛을 만들어가고 있는 열차 창문 밖 세계를 향하여 곁눈질을 하노라면 고요와 적막에 휘감긴다. 아마도 이 열차 안의 소란, 열차 자체의 소란을 감추려는 문명의 변신술이겠지. 세상을 여는 창이라. 그 창을 바라보느라 침묵 안에서 고요로웠던 신문 읽기를 마치고 이제 얼마간의 날 빛을 지나고 나면 황금빛으로 무르익어 갈 논밭 사이로 마을과 마을을 갈라 경계를 세우며 열차는 낯선 도시의 소음, 낯선 산야의 소음을 찾아 항해의 뱃길을 가듯 산야를 가르고 간다. 산야는 물결처럼 제쳐지며 열차의 꽁무니에 매달리며 잊혀져간 과거 속으로 침몰하고 나의 지나온 궤적을 애써 외면하는 나그네처럼 고독하다.

머무름을 기억하라는 듯 정거장에서의 머뭇거림, 정겨움이 묻어나는 곳은 낮고 고요로운 낮은 처마 지붕을 한 집들, 그리고 세월 속에 오랫동안 묻혀있을 법한 허름한 비탈집, 한결같이 조금은 위로해주어야 할 것들이 필요한 그런 풍경들. 그렇게 내 가진 것 없이도 내가 무언가 모자라게 보고 무언가 주어야 할 것 같은 깊은 여운을 주는 것들 속에 평화가 있으니 나는 어이 할까? 그 평화를 찾아 한없이 여행을 떠나고 싶으니 이 세상을 어이 할까? 무심한 세월의 주름살 같은 파동을 오래도록 안고 살아온 촌부처럼 깊어지는 이 시름을 어이 할까? 비닐 하우스의 투명한 가슴속에서 답을 찾아볼까? 모진 풍랑에 세월을 잘 견뎌낸 마을과 마을을 잇는 다리 아래로 흐르는 거친 물살처럼 내 마음의 고요를 깨우는 거친 사색에 몸살을 앓는다.

지금은 고요, 지금은 혼란, 뒤범벅이 된 마음자리를 바로 잡기 위해 이 혼란을 정리하는 나는 어느 틈에 다시 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적선의 심장을 한 흰 눈처럼 사그라들 수 있을까? 꽃이 피고 지는 세월의 결을 따라 나도 피고 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것이겠지. 누구라도...,

아! 아수라여. 아수라의 시대를 살며 웃음을 웃다니, 이 악마에 악령의 세계. 찬란하구나. 백작처럼 품격을 높이려는 그대들, 그 아수라의 혼령 앞에 멈추지 마라. 악귀를 찾아 길을 떠나는 방랑의 여행객, 그대는 오늘도 품격 높은 악령을 찾아 쟁취하거라. 그 끝이 혼령의 죽음을 인지하게 될 아수라의 끝이려니. 가까움을 느끼거든 아득함을 잊을 것이다. 그 아득함을 잊는다면 평화는 없다. 아수라는 오로지 현재에 머무르고 있으려니. 평화를 얻으려거든 아득하거라. 아수라, 아수라를 부르짖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당신들이 이루는 소란은 고요. 공동묘지의 적막과 같은 그런 공간을 창조한 것이려니.

아! 아수라여. 그대는 내 몸과 마음을 통일시키느니. 찬란하구나.
거미줄처럼 논과 밭을, 마을과 마을을, 산과 산을 넘어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우리의 인연들. 거리의 화약고. 꽃이 피어 아름다운가. 꽃이 있어 아름다운가? 꽃을 바라볼 눈이 있어 아름다운가? 세월을 느껴 강물을 바라보며 절로 가라앉는 숲이여. 먹장구름의 뒤를 쫓은 붉은 무리, 홀로 강렬하여. 우주를 지배하는 걸까? 맑은 물살, 붉은 황토 물살, 비 오는 날 먹장 구름 뒤로 비 개인 날 흰 구름은 초점 잃은 시한부의 눈빛처럼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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