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철의 시편을 읽고
아래의 시들은 1945년 이전에 김철 시인이 쓴 작품이다. 1945년 이전이란 시기는 우리에게 암흑기이다. 그리고 우리가 남과 북으로 이념적 스펙트럼을 달리하고 갈라서기 이전의 상황이다. 그때 그의 시적 심성은 어떤가? 아래의 두 편의 시는 당대를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서정을 대변하는 시적 기초가 되는 서정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노래 듣느니보다」
고이 간직한 꿈이
손에 만져지는 날
나는 웃음을
부러워하였나니
얄궂은 현실은
아름다운 풍속을
산산 깨쳐버림이였어라
이제 나는
꿈의 천사로 화신해야만
그대 노래
듣느니보다 행복하리라.
「1942년 7월」
어린시절
그때는 왜 갔나
버들피리 불며
나무가지 말을 타고
마음대로 뛰놀던
그 어린시절은
오, 그때는 못오나
눈처럼 희고
샘처럼 맑으며
거짓 티 하나 없던
어른들이 귀여워
머리 쓰다듬어주던
벌거숭이 어린 시절은...
1940년
나는 이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참으로 그리운 고향이 떠오른다. 지금도 언제든 오갈 수 있지만 꿈속에나 가 볼 수 있는 그런 정한이 배어 있는 고향을 시인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48년의 시 <보내는 마음>을 읽느니 보다 아래의 시편들을 읽고 더 깊은 상념을 갖는다. 하지만 시 <보내는 마음>에서 보여주는 질곡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과거역사가 드러나 있지만 그것이 거짓과 위선을 선택한 상황이 아닌 조건적 시대상황이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지금 우리가 당당한 주체로서 서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진실 앞에서 통곡한다.
같은 시인의 시<동강난 지도 앞에서>를 소개하는 것으로 통곡을 대변한다.
「동강난 지도 앞에서」
슬프다 상처깊은 이 땅에
청산은 푸르러도
동강난 지도 앞에
찢어지는 내 가슴
비노니 창천아
그 옛날 룡천검 다시 줄순 없느냐
무참히 잘리운 널 보느니
차라리 내 허리를 잘라버리렴!
1989년 여름 분계선에서
시집 『뻐꾸기는 철없이 운다』에서 발췌
그가 남쪽나라 그것도 전라도 땅에 근거를 둔 가족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일본과 중국의 조선인의 삶을 체험한 것은 시적 자양분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그런 흔적은 시에서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의 분단은 상처받은 몸으로 직결된다. 그런 실존적 인식은 무참히 허리 잘리운 조국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내 허리를 잘라버리렴! 이라는 격정적 휴머니티에 이른다. 이것은 순전히 순정한 시인적 서정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한 시인의 서정은 <동강난 지도 앞에서> 함께 두 동강 나고 갈래갈래 가슴 찢기는 아픔으로 시인과 생체적 리듬을 함께 하게 된다.
조국 분단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으면서 우리는 삼팔선의 쌍방이 북한과 미국이란 존재를 보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남쪽사람들은 잘못된 논리를 앞세워 비주체를 주체로 미화한다. 우리가 상실한 주체의 얼굴로 미군은 삼팔선에서 북한군과 총구를 겨누고 있다. 명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1945년 이후 우리의 주체적인 의지로 북한군을 향하여 우리의 동족을 향하여 총을 겨누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면 미군에 원격조정을 받은 우리의 총구가 우리 민족의 가슴을 겨눈 적이 있다. 그것은 주체, 비주체의 논쟁에 머무는 단순한 문제로 인식될 이야기는 아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아니 현상 중심으로 먼저 보자. 그리고 그러한 인식 상태에서 그 해결점을 찾자.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처지를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연재 끝>
아래의 시들은 1945년 이전에 김철 시인이 쓴 작품이다. 1945년 이전이란 시기는 우리에게 암흑기이다. 그리고 우리가 남과 북으로 이념적 스펙트럼을 달리하고 갈라서기 이전의 상황이다. 그때 그의 시적 심성은 어떤가? 아래의 두 편의 시는 당대를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서정을 대변하는 시적 기초가 되는 서정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노래 듣느니보다」
고이 간직한 꿈이
손에 만져지는 날
나는 웃음을
부러워하였나니
얄궂은 현실은
아름다운 풍속을
산산 깨쳐버림이였어라
이제 나는
꿈의 천사로 화신해야만
그대 노래
듣느니보다 행복하리라.
「1942년 7월」
어린시절
그때는 왜 갔나
버들피리 불며
나무가지 말을 타고
마음대로 뛰놀던
그 어린시절은
오, 그때는 못오나
눈처럼 희고
샘처럼 맑으며
거짓 티 하나 없던
어른들이 귀여워
머리 쓰다듬어주던
벌거숭이 어린 시절은...
1940년
나는 이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참으로 그리운 고향이 떠오른다. 지금도 언제든 오갈 수 있지만 꿈속에나 가 볼 수 있는 그런 정한이 배어 있는 고향을 시인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48년의 시 <보내는 마음>을 읽느니 보다 아래의 시편들을 읽고 더 깊은 상념을 갖는다. 하지만 시 <보내는 마음>에서 보여주는 질곡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과거역사가 드러나 있지만 그것이 거짓과 위선을 선택한 상황이 아닌 조건적 시대상황이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지금 우리가 당당한 주체로서 서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진실 앞에서 통곡한다.
같은 시인의 시<동강난 지도 앞에서>를 소개하는 것으로 통곡을 대변한다.
「동강난 지도 앞에서」
슬프다 상처깊은 이 땅에
청산은 푸르러도
동강난 지도 앞에
찢어지는 내 가슴
비노니 창천아
그 옛날 룡천검 다시 줄순 없느냐
무참히 잘리운 널 보느니
차라리 내 허리를 잘라버리렴!
1989년 여름 분계선에서
시집 『뻐꾸기는 철없이 운다』에서 발췌
그가 남쪽나라 그것도 전라도 땅에 근거를 둔 가족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일본과 중국의 조선인의 삶을 체험한 것은 시적 자양분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그런 흔적은 시에서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의 분단은 상처받은 몸으로 직결된다. 그런 실존적 인식은 무참히 허리 잘리운 조국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내 허리를 잘라버리렴! 이라는 격정적 휴머니티에 이른다. 이것은 순전히 순정한 시인적 서정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한 시인의 서정은 <동강난 지도 앞에서> 함께 두 동강 나고 갈래갈래 가슴 찢기는 아픔으로 시인과 생체적 리듬을 함께 하게 된다.
조국 분단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으면서 우리는 삼팔선의 쌍방이 북한과 미국이란 존재를 보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남쪽사람들은 잘못된 논리를 앞세워 비주체를 주체로 미화한다. 우리가 상실한 주체의 얼굴로 미군은 삼팔선에서 북한군과 총구를 겨누고 있다. 명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1945년 이후 우리의 주체적인 의지로 북한군을 향하여 우리의 동족을 향하여 총을 겨누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면 미군에 원격조정을 받은 우리의 총구가 우리 민족의 가슴을 겨눈 적이 있다. 그것은 주체, 비주체의 논쟁에 머무는 단순한 문제로 인식될 이야기는 아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아니 현상 중심으로 먼저 보자. 그리고 그러한 인식 상태에서 그 해결점을 찾자.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처지를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