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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만난 고려인(9)

  • 김형효
  • 조회 4974
  • 2010.07.28 15:31
장꼬이 고려인들과 보낸 3박 4일(3회)
IE001219853_STD.jpg   ▲ 장경남(81세) 선생과 부인 정조야 그레이츠스키(68세) 여사 장꼬이 고려인협회장 게르만장의 아버지와 어머니, 한국에서 왔다는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 김형효 icon_tag.gif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고려인 게르만장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아침 식사가 시작되기 전 안방에 있는 그의 아버지 장경남(81) 선생과 어머니 정조야 그레이츠스키 여사에게 인사를 올렸다. 인사를 올린 후 곧 주방에서 식사를 하였다. 쌀밥과 된장, 풋고추 그리고 빵과 햄, 치즈 등이 섞여 있는 식사였다. 게르만장의 부인 나줴즈다(39)는 우크라이나 여인이지만, 이미 한민족의 식습관을 체득한 것 같았다. 그녀가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먹는 모습은 색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식사가 끝나고 곧 게르만장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

 

역사 선생님의 준비된 강의가 시작된 것처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가끔씩 필자의 질문이 역사강의의 흐름을 제어하는 느낌을 주었지만, 장경남 선생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1896년생이었고 어머니는 1900년생이란다. 두 분 사이에는 4남 4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블라디보스톡 등지에 조카들이 살고 있으며 4남 4녀 중 유일하게 자신만 살아있다고 한다. 그는 지난 시대에 그리움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세월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 세상은 변했다고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삶의 변화는 내내 못마땅한 느낌을 간직한 듯했다.

 

구소련시대에 그것도 후르시초프 시대 이전에는 독립국가연합(CIS국가)에 거의 매일 비행기가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후르시초프 시대 이후로 비행기값이 10배 이상 상승하면서 오갈 수 없이 되었고, 장경남 선생은 조카들과 1998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후로 1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전화통화는 하지만 만나지는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선생은 1992년 100여개국의 재외동포 854명이 서울에 초대되었을 때 한국을 방문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그의 어머니 고 최경숙 님은 경주 최씨이고 아버지 장재유 님은 안동 장씨라고 했다. 그 이야기 후부터 안동이나 경주를 꼭 가보고 싶다는 말씀을 수차례나 반복하셨다.

 

 

그는 정확한 수치를 말하며 자신이 어린 시절에 러시아 극동에는 347개 학교가 있었고 민족군대만 해도 76개 조직이 있었다고 말했다. 홍범도 군대 그는 이야기를 급히 서둘러 갈 때는 범도 군대라고 이야기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범도군대라고들 불렀다는 것이 장경남 선생의 이야기다. 선생은 1930년도에 태어나 원동에서 어린 시절인 7살 때까지 살다 스탈린 시대의 고려인 강제 이주기를 맞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말이 이사지 많은 고려인들은 버려진 고려인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게르만장의 어머니 정조야 그레이츠스키(1942년생, 68세)님은 우즈베키스탄 까라깔바스키 아에수에스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장경남 선생을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장경남 선생은 1952년 스탈린 군에 입대했다가 후루시초프 시대에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전역했다 한다. 그와 나눈 이야기에서 역사적으로 불편하게 들리는 대목은 바로 그가 바라보는 스탈린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그는 당대의 역사에서 스탈린의 역할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지도자가 있었기에 당시 어려운 사람들이 굶어죽지는 않았다. 그의 말은 법치가 통하던 유일한 시기였다는 말이었다. 그의 경험에 의한 이야기이니 필자로서는 반대의 논리나 의견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를 말했다.

 

 

여전히 장경남 선생의 의견은 곧은 길을 가는 선비처럼 일관되기만 했다. 필자는 생각했다. 역사가 당대 경험만으로 당대의 사람이 보면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 당시는 과거와 미래라는 안목을 가질 수 없는 절대적이고 제한적이며 가학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니 절박한 상황논리가 엉키는 지점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수많은 우리 민족 성원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성인이 된 후 후루시초프를 경험한 사람으로 미소냉전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의 생활고에 대한 반대급부인 듯하다. 아무튼 그는 극구 스탈린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결국 그가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군대에서 제대하기 이전에는 굳이 패스포드가 필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르시초프 시대로 들어서면서 일은 시키고 패스포드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53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오호스 쁘라브다의 허름한 집에서 형님 내 식구와 자신의 두 가정이 한집에서 살림을 했다고 전했다. 그 집에서는 195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는 과거 12살 때부터 밭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에 앞서 말한 고려인 민족학교들이 정말 많았다고 그는 말했고 이어 우리 민족이 영리하고 공부를 다 하려고 했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때의 어려움을 회고하며 당시 그릇 몇 개 가지고 이제 아버지, 어머니 환갑잔치도 다 차려드렸다는 과거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면서 회한에 잠기는 듯했다. 곧 "북한은 많이 사랑한다"고 말을 잇는다. 그때 옆 자리에 부인이 "뭐 별 것을 다 말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그는 안동 장씨고 어머니는 경주 최씨지만, 모두 북에 살다가 이주한 고려인 가족이다. 그래서 가고 싶은 곳은 남녘이며 그가 살아온 시대에 구소련에 향수가 북한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유인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그는 오늘날 남북이 한글을 사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지난날의 회고로 이어졌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자기나라 땅에 살면서도 러시아말을 가르치고 배웠다. 과거에는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도 그들은 그랬다. 그때는 그래서 어디든 가도 불편하지 않게 살 수 있었다. 당시 북한에 김일성이 없었으면 북한도 고려말 못썼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확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은 필자의 인식에서 거리가 먼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고 불편한 진실들이 아직도 속내를 확연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우리의 말과 글이 특정인에 의해 쓰고 못쓰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좀 지나친 편견은 아닐까? 아직 밝은 길을 찾지 못한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결론 내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일로 남북이 함께 겨레말사전을 만들어가고 있는 현실을 반갑게 바라보는 일이 더욱 중요할 것 같다. 

 

 

다시 장경남 선생은 현실을 이야기를 이어간다. 과거에는 대학 나오면 밭에 나가서 일 안 했다. 지금은 대학 나오고도 밭에 나가 일한다. 과거에는 국가기관에서 일했다. 집도 주었고 일도 주었다. 그래서 걱정이 없었다. 소련연합(소비에트소유즈:Советский Союз)국가 시대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가 얽힌다. 1990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힘들어졌다.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도 무엇을 훔쳐가거나 인신공격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는 그런 일이 생겼다. 구소련 시대에 반복이다. 스탈린 시대에는 없던 범죄가 후루시초프 시대에 일어나던 것과 같은 현실이다. 1964년부터 1982년 브레즈네프 시대가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했다.

 

두서 없는 역사강의를 들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사실들을 그저 촌로의 푸념으로만 들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과 정황들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 개인의 경험에 의한 나열식 역사강의도 외면해서는 안 될 듯하다. 오래산 사람 자체가 역사적 주체의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하나의 박물관의 박제된 역사보다 살아있는 인간의 역사적 체험은 결코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출구가 없을 것 같던 장경남 선생의 역사 강의는 결국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구조로 막을 내렸다. 듣는 이도 긴장 속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갖기에 충분한 한 아버지의 충실한 가장으로서의 진실이었다.

 

 

여기 가장 장경남 선생의 마침 강의 고별사다. 이것은 거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가장의 소망일지도 모른다. "모든 가족이 한 도시에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이 정도면 늙은이 팔자 더 없지! 뭐,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사서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오전 0시까지 수리했다. 한국에서도 다 그렇게들 말하지 않나, 우리 민족은 모두가 영리하고 성실해서 이곳(우크라이나 혹은 장꼬이)에서도 좋은 평판들을 듣는다."

 

이제 우리의 지나온 과거를 보며 생각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이야기 중 군데군데 이해를 달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사람의 쓰라린 개인사에서 지나간 세월의 푸념으로 듣는 넉넉함을 가져도 좋은 시대라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민족 모두가 가져야할 공동의 아픔에 대한 치유법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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