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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에 가다(2)

  • 김형효
  • 조회 4264
  • 2009.11.1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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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의 작품 속 인물들을 형상한 조형물......, 
<푸쉬킨 상>을 수상한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안톤 체홉의 집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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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서자 안톤 체홉의 흉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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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나그네의 친절한 가이드가 되어주신 니꼴라이 아저씨~!

후일 만남을 위해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체홉의 집앞에서...필자와 함께

 

바다가 눈에 들어오고 높은 빌딩들이 숲 사이로 솟아 있어서

이곳이 얄타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고도 30분 정도는 더 간 듯하다.

 

모든 것이 낯선 이국적인 멋을 보여주어 달리는 차안에서 가능한 자세를 고쳐 잡고 셔터를 눌러댔다.

움직이는 차에서 그것도 창문을 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사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훗날 오래 기억하고 싶은 욕심이다.

작은 집들도 각이 잡혀있는 지붕과 건물들이 멋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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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를 맡은 이랴의 설명에 의하면 체홉이 사용했던 체홉의 의자라 한다.

 

예빠토리야에서 출발할 때는 비도 오고 또 근래에 찾아온 추위는 겨울 날씨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멀리 바다에 비추는 햇살이 버스 창까지 강렬한 온도로 비춰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햇빛이 뜨겁다.

몸 안에서 땀이 나고 어서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한다.

 

한참을 내리막으로 내려가더니 중턱에 곧 버스정류장이 나타난다.

얄타는 생각보다 큰 도시였다. 버스 정류장은 시내로 진입하는 입구에 있었다.

그러니까 외곽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잠시 머뭇거리면서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그러다가 사람 좋아 보이는 택시기사가 관광(ЭСКУРСИЯ! ЭСКУРСИЯ?)을 할 것인지 묻는다.

그저 알아나 보자는 마음으로 그렇다고 말하고 그냥 흥정을 했다.

 

처음 찾는 곳이고 일정이 급박해서

빨리 원하는 몇 곳을 둘러본 후 귀가를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서투른 여행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하루를 묵어가느니,

그 경비라면 택시로 서둘러 안내를 받아가며 여행을 마치자는 나름의 계산이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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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이 생전에 물을 길어 먹었다는 도루레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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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의 벤취다.

아마도 글을 쓰다 휴식을 취하며 저 자리에 앉아 궁리와 사색을 이어 갔으리라. 

 

처음 관광 안내책자를 보여주면서 이미 잘 알려진 관광지인

안톤 체홉의 집, 역사 문학 박물관, 얄타회담이 열렸던 라비디야(ЛИВАДИЯ),

그리고 1912년 독일인 부호에 의해 아이도토르 기슭에 세워진 제비둥지를 보고 싶다고 했다.

운전기사 니꼴라이(67세)씨는 역사 문학 박물관은 빼고

나머지 세 곳을 둘러보는 데 150그리밴(한화 3만원)을 요구했다.

 

필자는 20그리밴을 깎아서 130그리밴을 주기로 하고 차에 올랐다.

물론 모든 관광을 하는 데는 3시간이 넘게 걸렸다.

끝까지 변함없는 인상으로 친절을 베풀어주신 니꼴라이 아저씨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식사를 함께 할 것을 청했으나 거절해서

그냥 150그리밴을 드렸더니 흡족해 하신다.

다음을 위한 투자라는 마음도 있었다.

 

 

곧 출발하였다.

시내로 접어든 길목에 가로수가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위용 있게 반기는 분위기다.

마치 위병들처럼 도시를 지켜주고 있는 가로수들은 우크라이나 어디를 가도 부러운 모습이다.

이곳 얄타에는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흑해 바다로 흘러내리는 양쪽으로 방향을 달리한 도로가 있었다.

멋진 도로와 우거진 가로수에 홀로 속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러다 운전기사 니꼴라이에게 대단하다란 말을 건넸다.

아름다워요. 아름다워!(КРАСИВАЯ! КРАСИВАЯ!)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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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실에 있는 체홉의 집 조감도..., 폐결핵 요양차 머물렀던 곳이라 그런지

숲이 잘 조성되어 있어 마치 담양의 소쇄원같은 느낌을 주었다.

집을 가로질러 작은 냇물이 흐르는 운치는 정말 멋진 낭만을 느끼게 했다.

 

나그네의 찬사에 그는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는 듯 기쁜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나는 그때 그의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물으며 서로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나이 60이 넘은 어른의 편안함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마치 나의 아버지를 뵙는 느낌이라고 호감을 표했다.

그는 필자의 아버지에 나이를 물어왔다.

그렇게 서로 친화의 시간을 가지면 길을 가면서 멋진 풍경들을 놓치기가 아까워

택시 앞 유리창에 비추는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때 니꼴라이는 길가에 얄타의 명소 중에 하나인 알렉산드르 네비스키 성당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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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의 서재~! 그의 형제도 작가였지만, 그의 누이도 작가였다고 한다.

온 집안 식구가 모두 작가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집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쁜 일정이라 꼭 보고 싶은 곳을 골라 가는 길이지만,

속으로 알려진 명소만은 다 보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훗날 지리를 익힌 다음 다시 찾을 생각이다.

그때는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체홉의 집을 가는 길은 마치 돌담이 있는 시골 길을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서울의 달동네의 골목길을 가는 느낌도 들었다. 얼마 후 니꼴라이가 차를 세웠다.

아마도 20여분을 운행한 듯하다.

차에서 내리자 안톤 체홉의 작품을 상징화한 조형물들이 소나무 숲 사이로 보였다.

그리고 그 건너편 숲처럼 우거진 곳이 <안톤 체홉의 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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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의 집 입구..., 아래로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서면 요새같은 작가의 집이 있다.

 

안톤 우파블로비치 체홉(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문화어:

안똔 체호브, 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은 러시아의 단편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아마도 연극을 조금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원작인 <갈매기>나 <세 자매>는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보지 못한 사람도 그 제목은 귀에 익숙하리라.

그가 작가로서 활기있는 창작을 하던 중 폐결핵을 얻어 말년을 이곳에서 살면서

톨스토이와 막심 고리끼와 교분을 나누며 지내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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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 초상 앞에 톨스토이와 막심 고리끼, 집주인 체홉이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던 곳이라 한다.

때때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으리라~!

 

생가의 입구에는 푸쉬킨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그가 푸쉬킨 상을 받은 안톤 체홉은 푸쉬킨을 문학적으로 존경심을 가졌을 법하다.

바로 그 초상 앞에 테이블에서 막심고리끼와 톨스토이 그리고 안톤 체홉이 함께 차를 마시고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는 안내원의 설명이다.

 

필자는 후일 한국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작가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자는 마음으로

아쉬운 마음은 많았지만 사진 촬영을 미루었다.

필자의 솔직한 마음은 그 자리에 선 것만으로

깊고 오래된 여운이 가슴에 설레임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설레임을 멈추지 말고 오래 간직하고 싶은 나만의 욕심은

세계적인 문호 푸쉬킨의 초상 앞에 앉아 격조높은 대화를 나누었을

톨스토이와 막심 고리끼와 안톤 체홉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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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의 집을 나와 남북 분단을 가져온 회담이 열렸던 르비다야로 가는 길이다. 

 

 

체홉의 생애

 

 

체홉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록 (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를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록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15세의 체홉은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록 학교를 졸업한 반면, 체홉은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록 모교로 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 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체홉은 타간록에서 받는 장학금과 잡지의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홉은 문학잡지 《귀뚜라미(Strekoza)》, 《파편(Oskolski)》, 《자명종(Budilnik)》,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으며,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을 한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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