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크림자치공화국 예빠토리야에서 350km 떨어진 곳에 헤르손이라는 도시가 있다. 우크라이나 남부 도농 복합도시인데, 그곳에선 많은 고려인들이 농사일을 하며 살고 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고려인 협회가 개최한 '까레야다2009'행사가 헤르손에서 열려 참관을 위해 가본 적이 있다. 필자가 예빠토리야로 오기 전 머물던 니꼴라예프에서는 1시간 거리다.
|
여러 경로를 통해서 헤르손에 대해 들었고 헤르손의 고려인 협회장 트라핌(61)씨와의 만남을 기대했다. 그러나 봉사단의 신분으로는 소개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언젠가는 꼭 만나보겠다는 생각만 하다, 이번에 방학을 맞아 고려인들을 취재하기로 마음먹고 그를 찾은 것.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예빠토리야 고려인 협회장과 지난 6월 8일 그의 동생 집을 찾았다. 앞서 간단히 소개한 김보바(52)씨가 그의 남동생이다. 버스로 7시간을 가서야 헤르손에 도착했다. 이후 김보바씨가 버스터미널에 차를 보내주어 그가 살고 있는 스타르예 브례브까로 이동했다. 8시간이 걸린 셈이다. 지치고 힘든 여정이다. 그렇게 김보바씨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다음 날 아침 헤르손 버스정류장에서 조 트라핌씨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침 필자가 조 트라핌씨를 찾은 6월 9일은 알렉산더(애칭:사샤, 36세)의 생일이라고 했다.
|
|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러진다. 성대한 행사를 맞아 필자는 초대된 많은 고려인들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은 그의 자손이거나 사돈, 친구들이었다. 생일잔치에는 50여명은 참석한 듯했다.
조 트라핌씨의 집 마당에 새로 만든 2개의 테이블을 펼치고 정성스럽게 장만한 음식을 차리고 모두가 둘러앉았다. 이후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아버지 조트라핌씨의 건배사로 생일파티는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다. 아들에게 생일을 축하한다는 덕담을 건네고 초대된 손님들에게 건배를 제안하는 모습은 참 좋았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경로를 알 뿐 한국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91년 처음 한국에 다녀온 후 2년을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다는 조트라핌씨. 요즘 한창 한국노래를 배우는 중이었다. 2년 독학한 실력이라고 하기에는 출중한 한국어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조금씩 틀린 맞춤법이 더 정겹기까지 했다.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틀리게 쓴 한글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조트라핌씨는 요즘 열심히 배우는 노랫가락에 흥이 나서인지 작은 녹음기를 가져와서 한국가요 테이프를 틀고 노래를 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가 먼저 한곡을 부른다.
"물어 물어 찾아왔오./그 님이 계시는 곳/차가운 강바람만 몰아치는데/그 님은 간 곳이 없네."
노랫말을 조트라핌씨에게 적용시키며 들어보니 눈물 강이 되어 그의 가슴을 적실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떠나온 고국을 찾았지만, 그 흔적을 찾을 길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애타는 그의 마음을 곱씹어 생각해보게 했다. 촉촉이 젖어드는 눈가를 본다.
함께한 고려인 3세, 4세들은 그런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습에 낯설어 했다. 멀뚱한 눈빛으로 아버지, 할아버지를 쳐다보다, 음식을 다 먹었는지 삼삼오오 다른 자리를 찾아 식탁에서 벗어난다. 나중에는 나이든 사람들만 남아 이야기를 나누다 해가 저물었다.
많은 농사를 짓다가 최근에는 그 규모를 줄였다고 하는 조트라핌씨는 올해는 사만오천평의 수박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조금 짓는 농사가 사만오천평이라니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근면함이 그들의 확실한 생활기반이 되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의 사위도 그와 마찬가지로 사만오천평 수박농사에 십육만오천평의 밀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
참으로 놀라운 규모다. 그러니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인도의 카스트처럼 고려인들을 두고 농사꾼들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고려인들을 향해 '땅 파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담아 말한다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세계의 25%의 흑토를 보유하고 있는 자기네 나라 땅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러니 우크라이나 벼농사를 위해 고려인들을 초청해서 농사를 짓게 했다는 아르먄스까야나 끄라스노페레꼽스크, 쟝꼬이, 악쨔브리스까야, 헤르손 등지의 고려인들의 일꾼으로 전락한 자신들의 처지를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이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이주역사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맨 처음 이곳에 이주해온 사람들은 국제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물결을 따른 파리꼬뮨 이후의 소수 사회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이주자들이 있었다. 그 후로 온 것이 벼농사를 위해 초대된 고려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벼농사를 위해 초대된 그들이 구소련 체제의 붕괴를 이곳에서 맞게 되면서 오갈 곳이 없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왔으나 우크라이나에 거류민이 아니었기에 국적없는 고려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직도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무국적체류자 신분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근면성이 그들을 살리고 있었다. 참 다행이다.
|
그렇게 오갈 곳 없이 머문 자리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현재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이다. 그들 중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 고려인협회가 창립되었고 한국문화를 익히고 있다. 생활기반이 확실한 고려인들이 한국말을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으며 전통문화와 언어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생각한다.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이 보이는 조국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조국이 따라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국의 사람들이 좀 더 깊은 애족의 마음으로 관심을 가져주면 안될까? 애달프고 애달프다.
나이든 사람들은 조국의 말을 못한다고 부끄러워 하지만, 그 후세들은 전혀 생각도 없다. 조트라핌씨와 아들의 간극, 손녀와의 간극 등. 필자는 모자라는 역량을 다하여 조국이 눈을 뜨고 그들을 정성스럽게 보듬는 날을 기대하며 정성을 다할 생각이다. 조국이여, 동포의 안녕을 위해 봉사의 눈을 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