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편린을 찾아서 ①
마틴 김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사건들, 기록들, 그리고 경험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 조각으로 흩어져 있다. 이것들은 쉽사리 망각의 후미진 곳에 잠겨 사라져 버린다. 마치 삶의 물결에는 거대한 호수나 바다가 인식의 전부인 것처럼. 이런 망각이 재생되는 길은 회상이다. 기억하며 써내야 한다. 이 기억의 미시적 기록물이 후대에 다시 평가되고 복원된다는 것은 계속 전승될 때 가능하다.
한국에서 격동의 1980-90년대를 겪거나 지켜 본 사람들은 “문익환 목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여전히 지지와 비판의 경계선에 있게 된다. 이러한 그의 활동의 면면에 부모인 문재린(1896-1985) 목사와 김신묵 (1895-1990) 권사가 있었다. 그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 석방을 일상처럼 반복했던 익환 동환 두 아들의 부모이기 전에 우리가 잊었던 역사의 작은 조각들을 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연결시켜 놓는다. 공동의 회고록으로 된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가치를 “독립운동과 기독교 운동사”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재린과 김신묵은 북간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놀랄만하게 복원해 낸다. 그들의 회고록은 달리 표현하면, 북간도 독립운동사이자 그 동안 잊혀진 이 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학자들을 위한 일차 자료의 역할까지 한다. 당시 북간도는 기독교 운동의 주요 무대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의 회고는 한국 기독교 운동사이기도 하다. 개인사적인 행적을 넘어서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일제의 등살을 뒤로 하고 생존의 터를 닦은 만주의 북간도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희망의 교차점이 나타난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북간도의 명동은 세계 열강에 의해 유린되고 마침내 일본 제국에 의해 수탈당한 한국인들이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군 곳이다. 거기에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꿈꾼 지사들이 흘러 들었고, 비교적 “전통”의 규제에 자유롭던 그곳은 민족 기독교인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된다. 거기에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약연 목사가 있었고, 김신묵의 부친이자 한 때 동학운동에 참여했던 실학자 김하규도 있었다. 명동은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이 교육의 열의를 품었던 곳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회고가 교호되면서, 문재린에 의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교회의 주요활동이, 김신묵에 의해서 북간도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복원된다.
이 회고록에는 우리가 처음 듣는 이런 이야기들도 있다.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젊은 시인 윤동주의 죽음과 장례식이었다. 윤동주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지사 (도시샤) 대학 재학 중 일제에 의해 형무소에 갇혀 옥사하고 만다. 1945년 3월 6일 문재린 (목사) 은 용정 윤동주의 집에서 장례식을 집례한다. 김신묵의 회상에 이름짓기가 있다. 당시 여자들은 이름이 없었다. 그들이 이름을 얻은 것은 근대 교육의 산물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이름이 필요했고, “고만녜”로만 불렸던 여학생도 “김신묵”이란 이름을 얻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성은 달라도 다들 돌림자로 “신”자를 갖는다. 김신정, 문신린, 한신애, 이신송, 전신암, 윤신금,최신학, 남신현 등 “신”자 돌림의 여성이 50명이 넘는다. 근대 (modernity)는 근대교육도 낳았고 근대 이름도 낳았던 것이다.
이 회고록은 방대한 분량이 지시하듯,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되던 만주의 북간도, 한국의 격동의 한세기는 물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까지 이른다. 서구 세계가 다른 지역과 접촉을 할 때 그러하듯, 캐나다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와 무관하지 않다. 1898년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에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1925년 캐나다에서 주요 개신교 교단인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캐나다 연합교회” (United Church of Canada)라는 개신교단이 탄생하자, 연합을 거부하고 잔류한 캐나다 장로교회는 일본에 체류한 한인들을 위한 선교지로 옮겨가고 한국 선교지를 캐나다 연합교회에 넘겨준다. 1928년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의 추천으로 문재린은 현 토론토 대학 내의 임마누엘 신학대학 (Immanuel College)에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한다. 캐나다 유학 제 1호군에 속한 셈이다. 그의 이러한 캐나다와의 인연은 1971년 셋째 아들 영환의 초청으로 캐나다 이민을 통해서 다시 이어진다.
회고록엔 나와 있지 않지만, 캘거리의 한인 이민사의 한 부분으로서 1972년 캘거리 최초의 한인 교회 설립을 인도한 사람이 문재린 목사였다. 근대성이 빚어낸 사건들의 고리가 놀랍다. 문재린 목사의 개인적 행적은 캐나다 교회의 한국 선교뿐 아니라, 이제 피선교국인 한국의 후예들이 캐나다에 정착해서 한인 스스로의 교회를 세우는 모습에서 역사의 순환을 본다. 이 회고록을 통해서 우리 삶의 한 조작을 연결시키는 것은 “내” 삶의 자리가 홀로가 아님을 증거하는 셈이다.
*이글은 알버타 저널 2008년 1월 24일 (목)에도 실렸던 것입니다.
마틴 김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사건들, 기록들, 그리고 경험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 조각으로 흩어져 있다. 이것들은 쉽사리 망각의 후미진 곳에 잠겨 사라져 버린다. 마치 삶의 물결에는 거대한 호수나 바다가 인식의 전부인 것처럼. 이런 망각이 재생되는 길은 회상이다. 기억하며 써내야 한다. 이 기억의 미시적 기록물이 후대에 다시 평가되고 복원된다는 것은 계속 전승될 때 가능하다.
한국에서 격동의 1980-90년대를 겪거나 지켜 본 사람들은 “문익환 목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여전히 지지와 비판의 경계선에 있게 된다. 이러한 그의 활동의 면면에 부모인 문재린(1896-1985) 목사와 김신묵 (1895-1990) 권사가 있었다. 그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 석방을 일상처럼 반복했던 익환 동환 두 아들의 부모이기 전에 우리가 잊었던 역사의 작은 조각들을 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연결시켜 놓는다. 공동의 회고록으로 된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가치를 “독립운동과 기독교 운동사”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재린과 김신묵은 북간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놀랄만하게 복원해 낸다. 그들의 회고록은 달리 표현하면, 북간도 독립운동사이자 그 동안 잊혀진 이 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학자들을 위한 일차 자료의 역할까지 한다. 당시 북간도는 기독교 운동의 주요 무대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의 회고는 한국 기독교 운동사이기도 하다. 개인사적인 행적을 넘어서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일제의 등살을 뒤로 하고 생존의 터를 닦은 만주의 북간도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희망의 교차점이 나타난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북간도의 명동은 세계 열강에 의해 유린되고 마침내 일본 제국에 의해 수탈당한 한국인들이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군 곳이다. 거기에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꿈꾼 지사들이 흘러 들었고, 비교적 “전통”의 규제에 자유롭던 그곳은 민족 기독교인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된다. 거기에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약연 목사가 있었고, 김신묵의 부친이자 한 때 동학운동에 참여했던 실학자 김하규도 있었다. 명동은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이 교육의 열의를 품었던 곳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회고가 교호되면서, 문재린에 의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교회의 주요활동이, 김신묵에 의해서 북간도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복원된다.
이 회고록에는 우리가 처음 듣는 이런 이야기들도 있다.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젊은 시인 윤동주의 죽음과 장례식이었다. 윤동주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지사 (도시샤) 대학 재학 중 일제에 의해 형무소에 갇혀 옥사하고 만다. 1945년 3월 6일 문재린 (목사) 은 용정 윤동주의 집에서 장례식을 집례한다. 김신묵의 회상에 이름짓기가 있다. 당시 여자들은 이름이 없었다. 그들이 이름을 얻은 것은 근대 교육의 산물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이름이 필요했고, “고만녜”로만 불렸던 여학생도 “김신묵”이란 이름을 얻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성은 달라도 다들 돌림자로 “신”자를 갖는다. 김신정, 문신린, 한신애, 이신송, 전신암, 윤신금,최신학, 남신현 등 “신”자 돌림의 여성이 50명이 넘는다. 근대 (modernity)는 근대교육도 낳았고 근대 이름도 낳았던 것이다.
이 회고록은 방대한 분량이 지시하듯,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되던 만주의 북간도, 한국의 격동의 한세기는 물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까지 이른다. 서구 세계가 다른 지역과 접촉을 할 때 그러하듯, 캐나다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와 무관하지 않다. 1898년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에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1925년 캐나다에서 주요 개신교 교단인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캐나다 연합교회” (United Church of Canada)라는 개신교단이 탄생하자, 연합을 거부하고 잔류한 캐나다 장로교회는 일본에 체류한 한인들을 위한 선교지로 옮겨가고 한국 선교지를 캐나다 연합교회에 넘겨준다. 1928년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의 추천으로 문재린은 현 토론토 대학 내의 임마누엘 신학대학 (Immanuel College)에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한다. 캐나다 유학 제 1호군에 속한 셈이다. 그의 이러한 캐나다와의 인연은 1971년 셋째 아들 영환의 초청으로 캐나다 이민을 통해서 다시 이어진다.
회고록엔 나와 있지 않지만, 캘거리의 한인 이민사의 한 부분으로서 1972년 캘거리 최초의 한인 교회 설립을 인도한 사람이 문재린 목사였다. 근대성이 빚어낸 사건들의 고리가 놀랍다. 문재린 목사의 개인적 행적은 캐나다 교회의 한국 선교뿐 아니라, 이제 피선교국인 한국의 후예들이 캐나다에 정착해서 한인 스스로의 교회를 세우는 모습에서 역사의 순환을 본다. 이 회고록을 통해서 우리 삶의 한 조작을 연결시키는 것은 “내” 삶의 자리가 홀로가 아님을 증거하는 셈이다.
*이글은 알버타 저널 2008년 1월 24일 (목)에도 실렸던 것입니다.